오랫동안 이 사진을 좋아해 왔다. 집 밖으로 가볍게 산책을 나온 듯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에 나름의 감각을 잃지 않게 만드는 빨간색 셔츠의 조화. 녹색 숲을 배경으로 그 빨강은 강렬한 존재감을 발한다. 숲은 깊어 저 멀리로는 초록이 연두로, 다시 연둣빛 하양으로 변해간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로 숲과 조화롭게 어울린 그 분위기로 인해 그의 시선을 같이 좇을 뿐이다. 강렬하게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장면. 김옥선의 <함일의 배> 사진집의 표지 사진이다.
김옥선, 함일의 배, Kevin, the humanist, 2007
함일은 난파선을 탄 채 표류하다 제주에 정착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한국식 이름이다. 김옥선은 각기 다른 사연으로 제주도에 정착해 살고 있는 오늘날의 함일을 초상으로 기록했다. 평소 그들이 즐겨 찾거나 원하는 장소에서 자세를 취한 이들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 녹아든다. 사진 속에서 제주의 풍경은 그들로 인해 더 이국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살았던 현지인들보다도 더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과한 개입 없이 친구처럼 관찰자처럼 접근한 작가의 시선 또한 충분히 자유로우면서도 절묘하다. 과거의 함일은 잘못 도착한 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애타게 새로운 배를 기다렸다면, 사진 속의 모든 함일은 당분간 떠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배를 떠나보낸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떠남과 정착의 경계도, 고향과 타지의 경계도 없다. 오래전 제주에 정착해 이제 뭍사람이자 섬사람이기도 한 작가 본인처럼. 그러므로 이 작업은 새로운 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찬가이기도 하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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