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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

‘빈자의 미학’을 재론하며 나는 건축가가 본업인데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되었다. 뜻한 바도 없었고 모두 어쭙잖은 글로 채운 책들이지만 그중 몇몇은 해외에서 번역 출판되는 민망함을 겪기도 했는데, 급기야 나의 첫 책인 도 중국에서 지난달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나온 지 20년도 지난 이 작은 책을 중국에 소개하겠다는 출판사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의 중국에 필요한 글이라고 했다. .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단어의 나열로 반감까지 가끔 불러일으키곤 하는 이 제목은, 1992년 가을에 개최된 한 건축전시회에서 선언하듯 뱉은 말이다. 나는 한때 신학을 전공하려 했다. 나는 왜 기독교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어릴 적 내내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임에도 장남이 성직자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에게 걸려 뜻을 이루.. 더보기
하나하나의 마음가짐 떠도는 마음을 잡고 하나에 온 마음을 다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스마트폰 덕분에 수많은 친구가 생겼을까? 도무지 하나에 마음을 모으기가 어렵다. 수많은 대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무의식을 끌어당겨서 시간을 쏟게 하는 디지털 놀이판에서 노닌다. 정작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뒤쫓는다. 그나마 곁에 있던 한 사람의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 떠남조차 무겁지 않게 자유라고 선언했다. 한국화의 거두 송수남(1938~2013)의 ‘붓의 놀림’(2000) 앞에 선다. 거대한 하나의 붓결마다 응축된 힘에 마음이 멎었다. 하나, 하나, 붓결을 천천히 본다. 결마다 흔들림 없이 곧게 내려오면서도 강압적이지 않고 부드럽다. 붓이 종이에 닿을 때, 먹물.. 더보기
마지막 버스 지난가을, 어느 그리스 미술관장을 만났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우리의 얘기는 자꾸만 무거운 주제를 맴돌았다. 그리스의 재정난으로 인해 유럽연합의 지원금을 받아 간신히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말끝에 그는 하루하루가 공황 상태라고 했다. 아침에 바닷가에 나가면 난민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그리스와 터키는 IS의 끔찍한 폭력을 피해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의 관문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자존심이었던 그리스는 난민을 보듬을 만큼의 여력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목숨이 너무 가벼워지는 현실 앞에서 미술관의 미래를 얘기하기에 그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의 상황은 유럽의 오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를 상실한 이들의 탈출 앞에서 가난해진 유럽의 국가들은 자국민 보호를 핑계 삼.. 더보기
멀리 보는 마음가짐 마음이 답답할 때 멀리 보면 좋다. 산에 오르면 멀리 보이기 때문에 등산이 인기가 많다. 산에 올라 멀리 보이는 풍경을 보면, 마음에 쌓이고 맺힌 응어리들이 풀어지는 듯하다. 직접 산에 갈 수 없다면, 산수도를 편다. 작은 산수도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산에 오른 듯 마음이 풀어지는 효과를 느낀다. 왜냐하면 멀리 보기 때문이다. 이징(1581~?)이 그린 산수도를 편다. 산수도를 멀리 보는 법은 ‘높게 보기’(高遠), ‘수평으로 보기’(平遠), ‘깊게 보기’(深遠)의 삼원법이라고 부른다.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처럼 중심점을 모아서 보는 원근법과 다르다. 산수도는 멀리 보는 법을 바탕에 둔다. ‘높게 보기’는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이다. 산을 낮은 곳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법이다. 높게 올려다보.. 더보기
블록 프랑스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는 에서 시각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을 뜻했으며, 그래서 눈을 감았다와 숨을 거뒀다는 같은 의미였다는 것이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갤러리 룩스에서 전시 중인 박찬민의 아파트 작업은 시력을 상실해 가는 도심 주거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만하다. 대도시의 삶을 이야기할 때, 아파트는 이제 단골처럼 등장하는 작업 대상이기는 하다. 그만큼 일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박찬민은 아파트 벽에 새겨진 단지명을 지우는 연작을 소개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아파트 벽에 난 모든 창문들을 지워버렸다. 아파트의 이름이나 창문을 제거해 버리는 그 순간, 그곳은 집.. 더보기
나라의 미학 나의 미감은 나의 땅에서 나온다. 은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한다. ‘나라’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시작한다. ‘나라’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나’와 관계가 있다고 직감한다. ‘나라’는 내가 사는 땅으로서,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터전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이 자라나는 문화적 바탕이다. 타자와 다른 나를 무엇으로 표현할까? ‘조선국신사 등성행렬도’는 1711년 조선통신사가 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대마도의 번주가 당시의 행렬을 다와라 기자에몬이라는 화가를 시켜 그린 기록화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그림 속에서 조선의 대표사절단임을 보여주는 깃발이 형명기(形名旗)다. 흰색 바탕에 용이 그려진 깃발로 조선의 국왕을 상징해 통신사 행렬의 지휘 깃발이다. 하지만 용.. 더보기
언더프린트 언더프린트는 화폐나 우표 밑바탕에 깔리는 희미한 인쇄다. 그림과 사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강홍구는 이 언더프린트에 착안한 작품을 최근 원앤제이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는 서울의 재개발 동네부터 고향인 전남 신안까지를 어슬렁거리다 밑바탕이 될 만한 담이나 길바닥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벽에 직접 그리는 낙서를 대신해 자신이 찍은 벽 사진 위에 낙서를 한 셈이다. 생선 꼬리가 뒹굴던 길바닥 사진 위에는 생선 머리를, 나뭇가지 그림자 사이로는 참새들을 그려 넣는다. 세월호에 대한 풍자부터 명작 패러디나 짜장면 그림까지 낙서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특히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신기한 시골 마을의 방공 문구 중 ‘간첩’이라는 글자가 지워진 자리에는 연두색의 네이버 검색창을 그려 넣은 유머 감각이 .. 더보기
사랑으로 본 태극함 태극(太極)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태극은 궁극적인 원리와 가치로서 끝없는 무극이다. 태극은 사람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영원성과 무한성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꿈꾸는 무한한 가치가 사람을 아끼는 마음인 사랑이기를 바란다. 태극이 사랑의 극치라는 의미에서 ‘인극(仁極)’으로 부르고 싶다. 역시 사람의 궁극은 사랑이다. 사랑이 무얼까? 조선시대의 작은 백자합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합에는 태극과 건곤감리가 그려져 있다. 그 문양은 조선시대에 향로나 연적에도 종종 사용되었던 태극과 주역의 상징이다. 그 상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랑을 묻는다. 사랑은 품이다. 사랑이란 중앙에 음으로 양으로 사람을 아끼는 끝없는 품이 있고, 주변에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는 우주와 자연이 감싸주.. 더보기
가족과 함께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60대 중반의 네덜란드 작가 한스 아이켈붐. 그는 한때 오후 세 시경, 무작정 가정집의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그 시간대에는 남편이나 아빠는 일터로 나가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집에 남겨진 나머지 식구들에게 부탁해 그 집 거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셀프 타이머를 이용한 그 촬영에서 아빠의 자리는 한스 자신이 차지했다. 설명 없이 본다면 단란하기 그지없는 이 가족사진은 여러 장을 함께 늘어놓고 볼 때에야 비로소 동일한 등장인물이 있음을 가까스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이 연작의 제목은 ‘가족과 함께’. 소유격이 생략된 이 제목은 사진의 눈속임에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작가는 결코 자신의 가족인지, 친구네 가족인지 정체를 말해준 적이 없기에, 우리들의 길.. 더보기
터무니없는 도시, 터무니없는 사회 오래된 서양 도시들, 예컨대 런던이나 파리, 빈, 프랑크푸르트의 원도심은 2000년 전 로마의 군단 주둔지였다. 이 도시들의 중심지역인 시티지역, 시테섬, 그라벤, 뢰머광장 등이 카스트라라고 불렸던 로마군단 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이며, 군단 주둔이 장기화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캠프의 중심 공간이었던 포로나 중심 도로인 카르도, 데쿠마누스 같은 공간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장구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 캠프라는 시설은 필요에 따라 쉽게 설치하고 해체해야 하므로 평활한 땅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오늘날 대도시로 변모한 이 캠프가 설치되었던 평지라는 지형은 결국 서양인들의 도시에 대한 관념에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봇물.. 더보기
한국 종이의 ‘참을성과 질김’ 중국 명대 문인화의 거두 동기창(1555~1636)이 맑은 가을날을 소재로 ‘강산추제도’를 그렸다. 그가 이 명작을 완성한 것은 한국 종이의 미감 덕분이다. 동기창은 그림에 “거울 표면처럼 부드러운 한국 종이를 구하여 영감을 받아서 이 그림을 그렸다. 만력황제에게 보내는 종이로, 조선 왕실의 인장이 보인다”라는 글을 써넣었다. 그가 조선의 외교사절단이 중국 황실에 선물한 한국 종이를 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종이는 ‘고려지’라는 국제 브랜드로 인기가 높았다. ‘강산추제도’에는 기운생동을 얻기 위해 “만권의 책을 읽고, 천리를 여행한다”라는 동기창의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동기창이 추구한 문인의 기운은 무엇일까. 어떤 점에서 한국 종이의 미감과 통할까. 한국 종이의 미감은 참을성이다. 한국 종이는 닥나.. 더보기
완행열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 내에서 완행열차는 여전히 요긴하다. 넓은 대륙의 구석구석을 잇기에 완행열차만 한 것이 없고, 주머니가 가벼운 도시 노동자들의 유일한 귀향길 수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는 1시간40분짜리 고속철도 1등석 요금이면 완행열차로 중국 국토 여행이 가능하다니 기찻삯이 싸긴 싼 모양이지만, 성수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기도 한다. 에어컨도, 지정 좌석도 없는 이등칸에서 한여름 80시간을 달렸다는 이야기는 무용담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가난하기로는 이 열차 손님 못지않은 무명의 사진가 키안 하이펑은 4년 가까이 중국 내 거의 모든 완행열차에 올랐다. 호텔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며 벌어들인 40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은 죄다 촬영비로 들어갔다. 지난 23일 밤,.. 더보기
불꽃처럼, 생명처럼 백제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가 1400년 넘게 세월을 함께한 사랑과 축복의 힘이 강하다. 신라의 황남대총을 보면 부부가 북분과 남분에서 각각 떨어져 세월을 보냈지만, 백제의 무령왕은 벽돌무덤을 짓고 왕비와 한곳에 묻혔다. 무엇이 더 좋은지 알 수 없으나, 역시 무령왕과 왕비의 금슬은 부럽다. 백제 무령왕은 불꽃 같은 힘과 풀꽃 같은 생명력을 준다. 무령왕과 왕비의 금관에는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힘과 풀꽃처럼 피어오르는 생명이 담겨 있다. 백제의 불꽃 같은 아름다움은 신라 금관이 보여주는 나뭇가지의 직선미와 사슴뿔의 힘과 다르다. 백제와 신라의 오묘한 미감의 차이는 우리 문화에 다양한 기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령왕의 금관은 불꽃이다. 금관의 화염이 유연한 곡선미로 솟아오른다. 왕의 금관은 화염이 자유롭.. 더보기
여관방 연상게임 채승우는 신문사 사진기자였다. 우리나라 신문 사진의 성향은 유독 보수적인 편이다. 적은 인원으로 사건 중심 보도에 치우치다 보니 사진기자 특유의 시선을 담아낼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중년이 다 돼 장가를 가는 늦복을 누리더니, 홀연 19년의 사진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평소에도 끼가 많던 그이기에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가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에게 부리는 심술인지 모르겠으나 뻔한 여행 사진이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1년 동안 31개국을 돌며 깊이 있게 찍는다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호기심에 답하려는 듯 마침내 그가 류가헌에서 ‘여관방 연상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다. 여관방은 ‘여행 관광 방랑’의 줄임말이다. 그는 수많은.. 더보기
“지난 상처로 미래를 대비하다” 충효당 길사에 다녀왔다. 충효당 길사란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종가인 충효당에서 종손이 바뀐 것을 조상님께 고하는 제사다. 한 종가에서 종손이 바뀌는 것은 30~40년 만에 한번 있는 종손 교체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로, 각 문중의 어른들이 모였다. 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탔다. 먼동이 트면서 드러난 한국의 산천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류성룡이 보여준 조선의 생각가치는 무엇일까? 그 핵심에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반성적으로 기술한 이 있다. 그 가치는 지난 상처로 미래를 대비하는 태도다. ‘징비’는 시경의 ‘작은 것을 삼간다는 소비(小毖)’의 첫 구절이다. ‘징비’의 부분을 나름대로 현대어로 쉽게 풀어본다. “지난날의 상처를 살펴, 앞날의 우환을 대비한다. 벌을.. 더보기
현과 백 빛과 시간을 응축하면 상은 단순해지고, 색은 깊어진다. 손성모의 바다 사진에는 선과 색으로만 이뤄진 가장 단순한 세계만이 존재한다. 대형 카메라로 한 시간 가까이 장노출을 주자 바다와 하늘은 각기 짙은 회색과 흰색으로 무화되었다. 미니멀리즘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은 육안으로 지각하지 못했을 뿐 하늘의 밝음과 땅의 어둠이 대자연의 이치임을 깨닫게 한다. 디자이너 하라 겐야의 말을 빌리면, 백(白)은 색채가 아니라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으로 존재한다. 그 감수성은 텅 빔, 고요함, 맑음 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모든 찬란한 빛들을 합쳐 놓으면 아무런 빛도 없는 백의 세계가 되기에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양면이기도 하다. Lock wait timeout exceeded; try restarting transacti.. 더보기
백제, 그 웃음의 힘 석수(石獸)야, 너는 백제 무령왕릉의 수호 동물이다. 돌로 만든 동물이라는 의미로 석수라고 부른다. 애칭을 붙여주면, ‘통통 수호 전사’가 어떨까. 1971년 무령왕(462~523)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너도 세상에 소개되었다. 네가 무령왕의 무덤을 지켰으니, 벌써 1500살도 넘었구나. 석수야, 너를 보면 웃음이 난다. 큰 눈이 툭 튀어나오고, 입을 헤벌린 모습은 보는 이를 웃게 한다. 수호 동물은 악귀를 쫓으려고 무섭게 생겼다는데, 너는 반대로 웃긴다. 맞다. 너의 수호전략은 두려움보다 웃음이구나. 그래, 웃음은 적까지 친구로 만들어 버린다. 석수야, 네가 무령왕과 왕비를 지켰구나. 부드러운 능선 속에 감추어진 무덤은 다행히 일제강점기의 도굴을 피했다. 천만다행이다. 네가 무덤을 잘 지켜서 그런 듯하.. 더보기
은마 아파트 은마 아파트는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의 주역이자 상가 건물까지를 거느린 대규모 아파트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팰리스와 타운 등을 붙인 고층 아파트에 밀려 구식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사교육 열풍에 힘입어 대치동 명당 자리의 위용을 굳건히 지켜냈다. 심지어 재개발이 확실시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우리가 겪어온 경제개발과 주거, 교육 환경의 변천사가 이 은마 아파트라는 이름 하나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벨기에 사진가 세바스티앵 쿠벨리에가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은마 아파트를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 미국 교포인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처음 은마 아파트를 발견했다. 아무런 연고.. 더보기
“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히틀러의 동역자였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오래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 역사교과서 문제와 다시 오버랩되었다. 건축을 통해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의 지위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형량인 20년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 중에 스스로 죄를 뉘우쳤으며 히틀러와 나치의 잔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래 그는 대단히 유능한 건축가의 자질을 가졌었다. 그의 스승인 테세노프는 20세기 초 독일 현대건축의 선봉에 있던 건축가이자 학자였으며 슈페어는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 스스로 나치당원이 된 그는 나치의 뇌라고 불렸던 괴벨스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치를 .. 더보기
한·중·일, 도원의 꿈 한·중·일 정상회의가 곧 열린다고 한다. 외교가 국가이익의 각축장이라면, 문화는 화합의 열쇠다. 과연 한·중·일이 같은 이상을 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도원(桃源)’을 보게 하라. ‘도원’은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이다. 그 마을에 한·중·일 정상들의 꿈도 있기를 바란다. 20세기까지 한·중·일은 한자문화권에서 같은 고전을 읽고 생각하는 사고공동체였다. 다시 한·중·일이 공유해온 고전에서 공통의 화두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도원’은 동아시아에서 이상적인 사회의 고전적 상징이다. 중국 동진시대에 지방관료였던 도연명(365~427)이 쓴 ‘도화원기’라는 짧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한 어부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 이른다. 배에서 내려 동굴을 통과하니, 남녀노소가 평화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