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살갗의 무게 사진에서 잉크를 녹여낸다는 말을 이해민선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 몹시 낯설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사진의 끈적거림이나 물 한 방울에도 얼룩이 번지는 사진의 표면은 익숙한 일이었으나 사진이 애초에 액체 상태였다는 사실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았던 탓이다. 사실 잉크라는 물질 없이는 눈에 비친 이미지들은 제 아무리 카메라 렌즈에 빛으로 맺혀도 종이에 닻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해민선의 섬세함은 우리가 보는 이미지가 빛과 액체와 고체라는 물성의 전환 과정임을 놓치지 않는다. 하여 그의 작품 속에서 세상 모든 이미지는 비록 허상일지라도 부피와 무게와 질감을 갖는다. 그는 잡지 사진이나 직접 촬영해 출력한 사진의 표면에 특수한 약품을 처리해 잉크를 녹여낸다. 그리고 이렇게 녹여낸 잉크를 질료 삼아 애초 사진.. 더보기
오아시스의 마음가짐 둔황(敦煌)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곳으로 사막지대의 오아시스 도시다. ‘모래가 우는 산’(鳴沙山)과 ‘초승달 샘물’(月牙泉)의 오아시스를 가진 둔황은 깨달음의 가치공간으로 시간을 초월한다. 돈독한 빛이라는 지명은 상징적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막고굴(莫高窟)이라는 수많은 굴을 파고,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몇몇이 모여서 명상과 담론으로 마음의 가치를 잃지 않았던 태도가 둔황을 만들었다. 막고굴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지친 이에게 쉼을, 여행을 다시 떠나는 이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화해의 장소다. 둔황은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는 점에서 탈경계를 경험한 곳이다. 21세기 국경을 넘어서서 신(新) 실크로드의 부활을 도모한다면, 그 시작은 인본가치여야 한다. 미래형 비단길은 오아시스의 길로 부르.. 더보기
닻의 아카이브 골목에 들어앉은 집들은 번듯하지도, 반듯하지도 않다.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면 마당에 빨래를 널었는지, 장독대 위 화분에다는 뭘 키우는지 정도는 금세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원래 담벼락을 붙이고 사는 집들은 전날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보다 모르는 척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들이라 딱히 감출 것이 많지 않기도 하다. 김승택은 이런 집들을 사각형 안에 옹기종기 붙여 놓아 구경하는 재미를 더 쏠쏠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 길들은 생략되고, 바라보는 위치도 아래로 옆으로 다양해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훔쳐볼 수가 있다. 전봇대를 지나 세탁소 안을 기웃거리고, 지붕 위에 걸린 운동화 한 짝까지도 죄다 눈에 들어온다. 딱히 순서랄 것도 없이, 작품 속에서 눈길이 간 집들을 타넘다 보면 .. 더보기
천사로 산다는 것 프랑스 오통의 생라자르 대성당은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의 귀중한 보고다. 문맹인이었던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소박하고 단순하게 표현된 것이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이런 독특한 이미지 중에서도 유달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형상이 있다. 전혀 압도적이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지만 은근히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 작품은 천사가 동방박사에게 예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다. 동방박사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동쪽에서부터 온 현인 혹은 점성가이다. 이 장면은 동방박사들의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 “저 별을 따라가라. 왕이 나셨다”고 계시하는 모습이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마치 한 몸처럼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삼위일체의 메타포.. 더보기
[여적]미완성곡과 김광석 예술작품에서 미완성작은 완성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두 작품은 모두 작곡가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그 어떤 완성곡보다 음악애호가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이 유명해지기까지 큰 차이가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남편 사후 생활고에 찌든 아내의 부탁으로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해 의뢰인에게 완성품처럼 건네졌다. 반면 건망증이 심했던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은 2개 악장이 빠진 채 사후 37년 만에 발견돼 미완성곡 그 자체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미완성’이라는 표제가 붙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과 달리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제자의 도움으로 미완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 더보기
하늘을 나는 집 낭만의 도시 파리의 주택가. 이 근사한 말들의 조합은 그 주택가 앞에 서보기 전까지만 의미를 지닌다. 아주 고급한 주택 단지가 아닌 한 파리는 집시와 아랍계 이민자와 화교들이 더불어 사는 전 세계의 축소판 공동 주택이다. 크지 않은 도시, 다양한 사연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곳에서 집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상징적이고 복잡하다. 그것은 자유와 희망을 의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정착할 수 없는 삶들이 거쳐가는 불확실한 미래에 불과하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깊은 밤 몸을 누일 수 있는 거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거처를 얻기 위한 조건들은 갈수록 힘겹고 까다로워진다. 만약 정주의 상징인 집이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집을 얻고 지키기 위한 굴레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질 수 .. 더보기
[기고]공연 부가세 과감히 면제하길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5년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공연예술분야 지원을 위해 창작 공연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를 검토한다고 한다. 어려운 공연계 현실에서 이러한 세제 혜택은 가뭄에 단비가 될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시행령이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창작 공연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근래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창작 공연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산’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국산’ 창작 공연이라고 하면 국내 제작자와 국내 작가진(작곡가를 포함한)이 만들고 그 소재는 국내의 이야기 소재여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창작 공연들을 보면 이러한 범주를 벗어난 작품도 많다. 한국의 원작을 가지고 해외 작가진이 만든 공연도 있고, 해외 원작을 토대로 국내 작가들이 만든 .. 더보기
존재에 접속하는 놀라운 시선 ‘보데곤(bodegon)’은 스페인의 정물화를 일컫는 말이다. 영어와 프랑스에서는 정물화를 각각 ‘스틸 라이프(still-life)’, 즉 움직이지 않는 생명 혹은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즉 죽은 자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선술집을 의미하는 보데가(bodega)에서 비롯된 ‘보데곤’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니까 보데곤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다. 원래 그것은 술집이나 요릿집을 묘사하거나, 즐비하게 놓인 음식을 배경으로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 그렇듯이 외면상 일상적인 소재이지만, 종종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장르는 펠리페 3세(재위 1598~1621) 치정하의 세비야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했다. 세비야.. 더보기
증거 아랍의 봄 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무너졌다. 다이애나 마타는 처음으로 남편의 고국 리비아의 땅을 밟았다. 소년 시절에 나라를 등진 후 처음 찾아가는 남편에게도 감회가 새로운 여행이었다. 40년이 넘는 카다피 독재 정권 동안 수많은 이들이 투옥되고 실종되었다. 그 명단 속에는 다이애나가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 자발라 마타도 포함되어 있다. 반정부 지도자였던 자발라는 1990년 망명지인A 카이로에서 납치된 뒤 여전히 실종 상태다. 납치 5년 후 가족들은 그가 리비아 감옥에서 몰래 부친 편지 한 통을 받았으나 마지막 소식이었다. 고은사진미술관의 ‘두 개의 달’ 전시에서 소개하는 다이애나의 ‘증거’는 이렇듯 실종된 시아버지에 관한 작업이다. 다이애나는 과거 시아버지가 머물던 이집트와 이탈리.. 더보기
‘포촘킨파사드’와 도시의 속살 18세기 중엽, 프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절대군주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인 표도르 3세를 축출하면서 제위에 오를 만큼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과 크림반도의 합병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내부로는 행정개혁과 문예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뤄 절정의 시대를 구가한다. 이방의 여인임에도 러시아의 전통과 풍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얻은 그녀는 예카테리나 대제로도 불렸으니 성공한 통치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당나라의 측천무후와도 곧잘 비교되는데, 특히 남성편력에서 둘은 막상막하였다. 그녀의 많은 정부 중에 크림반도 총독으로 임명된 그레고리 포촘킨이라는 인물이 있다. 1787년 여제가 크림반도를 시찰하겠다고 하자, 조잡하고 낙후된 마을 풍경이 마음에 .. 더보기
최초의 스토커는 누가 만들었나? 키클롭스(Cyclops)는 외눈박이 거인족이다. 키클롭스는 ‘둥근 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키클롭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라노스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추한 모습의 거인 아들이 역겨워 오랫동안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뛰어난 대장장이이기도 했던 그들은 훗날 가장 강력한 무기인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바치고 풀려난다. 이 키클롭스 중 하나인 폴리페모스(Polyphemus)는 오디세이의 모험 중 세이렌과 더불어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오디세이 일행을 잡아먹고, 결국 오디세이의 지략에 의해 눈이 멀게 되는 스토리의 주인공 말이다. 그 외눈박이 거인이 어느 날 바다의 님프인 갈.. 더보기
바그다드 호텔 영화 는 이라크가 아닌 캘리포니아의 사막을 배경으로 한다. 황량하고 낯선 그곳에서 표류를 시작한 독일인 자스민은 카페 여주인 브렌다를 만나 우정을 싹틔운다.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닌 두 여성이 서로를 보듬어 가는 영화의 줄거리는 삶의 변두리에 선 이들을 향한 따듯하고 연민 어린 시선으로 가득하다. 덕분에 모래바람이 잔뜩 일어나는 외딴 사막도 카페 이름만큼이나 이국적이다. 영화 제목과 비슷한 그랜드 바그다드 호텔은 상상이 아닌 실제의 공간이다. 이곳 또한 바그다드에 있지 않다. 대신 술라이마니야라는 이라크 북부 도시에 있다. 이 호텔과 인근 숙소에는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공격을 피해 도망쳐 나온 난민들이 산다. 말이 호텔이지 화장실을 같이 사용하는 쪽방에 가깝지만, 그들은 그나마 목숨만은 건질 수 있.. 더보기
깨어나기 어려웠던 여자의 양심 빅토리아왕조시대는 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당대는 여성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순결하고, 모성적, 순종적인 결혼한 여성과 창녀와 더불어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 말이다. 특히 후자는 비정상적인 쾌락으로 가정을 파멸시키고 질병을 퍼뜨리는 존재로 간주됐다. 사회가 비난한 것은 창녀를 찾는 남성들이 아니라 창녀들이었다. 여성에게만 도덕성을 강요하던 왜곡된 성윤리의 사회였던 것이다. 이처럼 빅토리아시대는 겉으로 보면 상당히 경건하고 규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엽기적이고 난잡한 스캔들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라파엘전파는 빅토리아시대의 이런 정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집요하게 그림으로 표현했다. 윌리엄 홀먼 헌트는 라파엘전파의 어떤 화가보다도 꼼꼼한 세부 묘사와 선명한 색채.. 더보기
라플란드 너머 더위 막바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는 e메일을 받았다. 내년에 다시 올 초복보다 크리스마스가 더 가까운 건 맞다. 이제 산타에게 편지를 부치면 답장을 해준다는 산타 마을도 훨씬 분주해지려나. 이 마을은 라프족이 산다는 라플란드에 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등에 걸쳐 있는 땅이다. 순록을 타고 오로라의 장관을 경험할 수 있는 이국적인 곳. 라플란드라는 이름에는 늘 이런 환상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라프족과 라플란드라는 말을 좋아라하지 않는다. 라프족은 ‘꿰맨 옷을 입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바깥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조롱 섞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이미족이라 부른다. 순록이 먹을 이끼를 찾아 해안가와 내륙을 오가며 살아가는 세이미족의 유목 .. 더보기
한여름 밤의 악몽 한밤중의 침실, 한 젊은 여성이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상반신은 침대 아래로 크게 젖혀져 있고, 목은 활처럼 굽었으며,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고, 볼은 어렴풋한 홍조를 띠고 있다. 게다가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잠옷으로 보태진 몸의 굴곡이 커튼과 휘장 그리고 분홍, 노랑, 붉은색 등의 겹겹이 늘어진 시트와 중첩되면서 우아미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헨리 푸셀리는 스위스 출신 화가로 영국에서 활동했다. 런던의 왕립아카데미 교수로 명성이 높았지만 사후 잊혀졌고, 현대에 와서 재평가되었다. 아직 정신분석학과 같은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개념에 천착한 학문적 연구가 부재한 시절, 푸셀리는 셰익스피어와 밀턴 같은 영국의 대문호에 영감을 받아 ‘꿈과 악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781년 ‘악몽.. 더보기
가족 앨범 중국 베이징 기차역 근처에 살고 있는 사진가 리우 지에는 매일같이 기차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부모를 따라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자신처럼 그들 또한 새로운 삶을 찾아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현재 도시로 떠나온 중국의 이주노동자는 2억5000만명, 대신 시골에는 2000만명의 노인과 5800만명의 아이들이 남겨져 있다. 이런 아이들의 상당수는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지만, 심하게는 아이들끼리만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단 도시로 떠나온 이들은 쉽게 고향을 방문하지 못한다. 가진 기술이 없는 농군들이 찾을 수 있는 일자리란 공장이나 건설 현장 일용직이 고작이고, 주 6일을 근무해도 몇 푼 안 남는 월급으로 오가는 데만 이틀 걸리는 고향집 방문은 호사스러운 꿈일 뿐이다. .. 더보기
자극하다 마네가 가장 사랑했던 모델 중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었다. 서양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작품인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의 모델이 바로 그녀다. 마네는 1860년대 쿠튀르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모델을 서던 그녀를 만났다. 1862년부터 1874년까지 그녀는 마네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마네는 어떤 여인에게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가 그 여인이 주저하자 “싫으면 관두라지. 나에게는 빅토린이 있으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긴 빅토린 뫼랑이 헐렁한 분홍색 실내복을 입고 서 있다. 오른쪽 옆의 앵무새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사치와 퇴폐 혹은 성모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이 그림은 인물화인지 정물화인지 모호.. 더보기
공상 영화처럼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면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인류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훨씬 진화한 신인류가 그렇게 멸망한 현생 인류의 흔적을 사진을 통해 발견한다면, 우리네 문명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까. 미국 사진가 피터 레이턴의 작업은 이런 상상에서 시작한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극장에 떠맡기다시피 해서 관람한 공상 과학영화는 하필 인류가 핵폭발을 겪고 살아남는다는 내용이었다. 엉뚱한 상상력과 달리 레이턴은 꽤 나이가 많은 작가이니 그 영화는 오래전의 조잡한 영화였는데도 그때의 시각적 경험은 늘 그를 쫓아다녔다. 하필 인류는 그 영화의 예언처럼 핵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반드시 핵이 가져올 재앙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핵을 다룰 만큼 뛰어난 인류라 해도.. 더보기
건축과 장소, 그리고 시간 오만과 편견의 아베도 이 건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착공을 앞두고 있던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를 원천적으로 바꾸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공사비가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이유를 받아들였다지만 사실은 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당선된 이 경기장은 그 크기나 모양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이 자랑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기존의 경기장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모습에, 건축계를 중심으로 건립 반대운동이 일었던 차였다. 점잖은 인품을 지닌 노건축가 마키 후미히코까지 그 선봉에 있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싫어하는 일본의 지식인과 건축가가, 남이 설계한 작품 그것도 공모형식을 통해 당선된 세계적 외국 건축가의 건축을 두고 안된다.. 더보기
탐서주의자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1886년 프랑스 파리로 옮긴 이후 꽃병 연작을 그렸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꽃 그림은 40점이 넘을 정도다. 아마 모델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으리라. 이후 남프랑스 아를에서 ‘해바라기’보다 더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정물을 그렸다. ‘협죽도가 있는 정물’이다.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빛에서 사물이 얼마나 밝고 화사하게 보이는지를 몸소 깨달은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노란색, 붉은색, 밝은 녹색, 푸른색을 사용해 보색 대비효과를 나타내려 했다. 화면 중앙의 녹색 잎과 주황색 꽃은 서로 색채대비를 이루고, 꽃병의 푸른색은 배경과 탁자의 책에 쓰인 노란색과 상생하며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구도적으로 반 고흐는 테이블과 꽃병을 화면의 오른쪽에 약간 치우치도록 배치했다. 그렇지만 이파리를 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