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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누구나 멋진 풍경을 그리워한다. 수직 절벽 아래로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안개 자욱한 연못을 에워싼 짙은 단풍 숲은 머물고 싶고 소유하고 싶다. 이발소 그림이나 달력 사진은 현실에 몸이 매여 있는 우리를 이런 곳으로 가장 친절하게 데려다준다. 그럼에도 늘 싸구려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다. 너무 진짜 같기만 해도 상투적이고, 진짜만 못해도 촌스럽다. 뻔한 구도와 조야한 색깔은 이런 인상에 한몫한다. 거기에 우리 눈이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는 풍경화의 전통도 이런 선입견을 부추긴다. 김병훈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과연 아름다운 풍경을 달력 사진처럼 재현하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가 관념 속에서 기억하는 풍경과 실제로 가서 맞닥뜨리는 풍경의 오차 폭을 사진에서는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를 두고 그는 오랫동안 고.. 더보기
거부하기 힘든 판타지 내 인생의 첫 그림은 공중목욕탕 탈의실에 걸린 그림이었다. 숲 속에 아름다운 여자가 가로 길게 누워있고 여러 명의 아기 천사가 그 주변을 날아다니고 장난치는 모습이 담긴 복제화였다. 유년 시절 목욕을 끝내고 나른해진 심신의 상태는 그 그림을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그 그림을 보는 재미에 홀딱 빠져있었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 그 그림이 비너스와 큐피드들인 것을 알았지만, 그 감동은 유년만 못하다. 비너스 그림 중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비너스의 탄생’일 것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고 거품이 일어나면서 그 속에서 비너스가 태어난다는 내용은 언제나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만큼 호의와 비판의 경계에 있는 .. 더보기
우리가 알던 도시 과거형은 단절이다. 알던 도시는 아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우리가 알던 도시’라는 제목으로 강홍구와 박진영이 기록한 도시들을 보여준다. 지진과 해일로 도시가 사라져버린 후쿠시마와 재개발로 몸살을 앓았던 은평 뉴타운은 원인은 다르지만 도시의 실종에 대해 묘하게 보는 이를 자극하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는 이 실종이 과거형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진행형을 낳는다는 데 있다. 두 작가의 작품 속에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공사장의 철근더미나 폐허 속에 덩그러니 남은 산요 선풍기 등은 과거 그곳에 살았을 어떤 가족, 선풍기 바람을 쐬던 누군가의 운명에 대해 궁금하게 만든.. 더보기
무심한 멘토 현대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 1위, 20세기 미술 중 가장 중요한 작품 1위의 가장 강력한 후보는 뒤샹과 그의 변기 작품인 이다.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은 개념미술이다!”라는 선언이 나올 정도로 그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앤디 워홀은 물론 데미언 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가들의 멘토가 바로 뒤샹인 것. 뒤샹은 1년에 회화 한 점만 그려주면 1만달러를 주겠다는 요청을 받는 등 뉴욕에서 더할 수 없는 명성을 얻게 되지만 1923년 겨우 36세의 나이에 일체의 예술 활동을 중단한다. 체스를 두기 위해서다. 그는 도서관 사서와 불어교사 알바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체스에 창조적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렇다고 예술작품을 제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보여주기 위해서나 먹고살기 위해서.. 더보기
두 명의 경찰관 사진 속에서는 경찰관이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둘의 제복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기관의 제복이 이렇게 다를 수는 없으니 둘 중 하나는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공무 수행 중이 아니라 뭔가 연출된 상황인 것인가. 아니면 이들 모두가 제복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일단 표면상의 의미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 사진은 수많은 의심들로 가득 찬다. 그렇다고 명쾌한 단서를 던져 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보는 이를 한없이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은 작가의 눈속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더 말해 줄 여지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진 속 한 명은 영화 속에서 경찰을 맡은 배우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질서 유지를 하고 있는 실제 경찰관이다. .. 더보기
성모자상을 흥미롭게 감상하는 법 서구 미술관에 가면 성모자상이 넘쳐난다. 그래서인지 모자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이 도상은 더 이상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성스러운 모자관계,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헌신적인 사랑 등등의 레토릭이 일종의 클리셰(Cliche·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자상에 흥미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이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겐 엄마가 불안한 존재이고, 알 수 없는 여자이며, 자식을 돌보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최성기의 화가 조반니 벨리니는 성모자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다. 그는 왜 그렇게 성모자상에 집착했던 것일까? 먼저 벨리니의 .. 더보기
이동갈비 이동갈비라는 말, 작업의 제목치고는 좀 웃긴다. 그렇다고 경기도 이동면에서 유래했다는 갈빗집만을 소개하지도 않는다. 대신 갈비를 핑계 삼아 ‘이동’을 요구하는 우리 시대의 여가 활용법을 다룬다. 그런데 갈비를 먹기 위해 찾아가는 이 장소들의 구조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일단 관광버스 수십대가 손님을 싣고 와도 끄떡없을 넓은 주차장과 식당을 갖췄다. 단체부터 연인까지 다양한 취향을 위해, 노래가 가능한 별실이나 오붓한 정자 같은 특화된 공간 구성도 필수다. 여기에 맛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바로 식탁까지 경치를 배달해준다는 점이다. 실내에 굵은 나무가 통째로 자라는 것은 기본이고, 식당 밖 풍경이 너무 밋밋하다면 수십미터짜리 인공폭포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밥집들은 거의가 도심 밖에 있다. 외곽이라지만 당.. 더보기
정원사 모네가 창조한 수련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절경에 인간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네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원을 몹시 사랑해 부인의 안부는 묻지 않고 꽃들의 안녕을 먼저 물었던 모네야말로 평생 아름다운 풍경을 가꾸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정원을 자신의 눈과 손과 그림 속에 영원히 각인시켰다. 시간과 계절의 추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원의 모습을 담았는데, 인상주의자답게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탐색했던 것이다. 사실 모네는 쉰이 될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호사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여행, 요리, 정원이었다. 그리고 결국 1883년 파리에서 70㎞ 떨어진 시골 지베르니로 이사한 몇 년 후 집을 구입하면.. 더보기
제곱미터 새집을 짓고 나서 아직 담장을 두르지 않은 시골 이모 집에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마당을 내다보던 이모가 이렇게 탄식했다. “귀한 흙 남의 밭으로 다 쓸려가겠네.” 평생 논밭을 일궈 살아온 이들에게는 한 줌 흙조차도 허투루 나눠줄 수 없는 생명의 텃밭이었을 것이다. 분신과도 같은 그 흙덩이가 모여 땅이 되고, 그 땅이 꺼지거나 솟아나 산수를 이룬다. 풍경이 애달픈 것은 이렇듯 그 흙에 유전자처럼 새겨진 뭇 생명들의 사연 때문이다. 그러나 풍경 사진 속에서 이런 애틋함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대체적으로 그것들은 너무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어서 어머니가 만지던 흙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특히 카메라야말로 지극히 서양적인 시각화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김윤호에게 사진이 보여주는 풍경은 대개가 눈속임이다. 이런 카메라.. 더보기
내 친구의 서울은 무엇인가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가 서울? 적어도 내 주변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근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아는 외국의 건축가들이 서울을 찾는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오기 힘든 동북아 끝에 위치해 있건만 도쿄나 베이징, 홍콩 온 길에 일부러 들렀다고 하니 예삿일이 아니다. 또한 밖에 나가 그곳 건축가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서울에 관한 게 대단히 많아졌다. 전시회나 심포지엄을 해외에서 개최해 보면 전례 없이 많은 현지인들이 모여 서울을 논한다. 전과 확연히 다르다. 한류의 영향?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실에 냉소적이기 쉬운 건축가들이 그런 것으로 영향받지 않는다. 서울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옳다. 사실 서울은 그동안 너무도 저평가되어왔다.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에서 정작 그들이 좋아하는.. 더보기
진지함을 비웃다 미술사는 웃는 얼굴을 기록하지 않았다. 웃음은 경박하고 천한 것이며, 영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에서 금서가 된 희극(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희극일 것이라는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을 싫어했는데, 웃음이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없애면 악마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고, 그러면 신앙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렇게 금서에 묻힌 독 때문에 수도사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은 신앙이 공포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미소가 아닌 깔깔 웃는 두상을 만든 작가가 있다. 그뿐 아니다. 하품하는 얼굴, 찡그린 얼굴, 아이처럼 울고 있는 얼굴, 엄청 화가 난 얼굴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얼굴표정이 조각 작품으.. 더보기
청계천 메리야스 차림의 사내가 아랫도리가 시원한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는다. 숱 많은 검은 머리의 사내는 아직 젊고, 아이는 그런 아빠의 품이 넉넉하여 공중에 뜬 채로도 평온하다. 동네 소박한 식당 앞,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쳐 흥이 난 아빠가 춤사위를 대신해 아이를 어르는 여름밤. 그런 평범한 밤일 것이라 착각했다. 대책 없이 떠나야 하는 재개발이 두려워 아이 품에 기댄 채 흐느끼는 여린 아빠라는 사실은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이 한 장의 사진도 오독하는 판에 제멋대로의 해석과 이해가 뒤엉킨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파란만장할 것일까. 어쩌면 아들은 아빠의 팔뚝 안에서 든든했고, 아빠는 그런 아들을 의지해 그 뜨거운 여름날들을 지나온 것만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사내가 이내 멀쩡하다.. 더보기
수도사의 불륜이 낳은 그림 피렌체에 가면 보티첼리만큼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보티첼리의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다. 그래서인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 속 시모네타만큼 어여쁜 여자들이 그의 그림에 넘쳐난다. 어쩌면 그녀들은 보티첼리보다 덜 이상화되어 있는 동시에 훨씬 더 관능적인 여자들임에 틀림없다. 프라(fra)는 이탈리아어로 ‘승려’라는 뜻이다. 고아가 된 리피는 15세 무렵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카르멜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카르미네 수도원에 입단해 평생 수도사 겸 화가로 살게 된다. 미술사상 그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많은 일화와 추문을 남겼다. 술과 여색을 탐했으며, 술고래에 사기꾼으로 알려진 그는 방탕하고 분방한 일생을 보냈지만, 예술에서만큼은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빛의 교차를 .. 더보기
엄마가 엄마에게 5·18 민주항쟁의 첫 희생자는 김경철이었다. 어렸을 적 약을 잘못 먹어 귀가 먼 스물여덟의 농아. 국제양화점에서 신발 만들면서 백일을 갓 넘긴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소박한 가장. 광주버스터미널에서 계엄군들이 그를 학생으로 오인해 둘러쌌을 때 그는 구령을 따라 부르지 못해, 진짜 벙어리가 말을 못한다는 죄로 목숨을 잃었다. 말을 하는 이조차도 말문이 막힐 기막히게 억울한 시절이었다. 이제 그는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1-1이라는 번호로 그날의 끔찍함을 증언한다. 그런 아들 곁에서 소복을 입고 선 어머니 임근단 여사.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머리 위편, 잔디 안에 심어진 진갈색 나무에 유독 눈길이 가곤 한다. 그것은 아직 봄이 먼 날들을 버티다 누렇게 변해버린 어머니의 가슴속 같기도 하.. 더보기
사냥의 여신이 된 왕의 애첩 18세기 로코코 예술의 핵심 인물은 마담 퐁파두르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들은 로코코 예술을 마담 퐁파두르 양식으로 부른다.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20여년 동안 문화예술의 후견인은 물론 섭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퐁파두르가 왕의 여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점성술에 심취했던 어머니 덕분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의 딸이 미래에 왕의 여자가 된다는 점술을 들은 모친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사교술과 매너, 인문학과 음악·예술 등 다방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한 집중교육에 들어간 것. 다행히도 총명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퐁파두르는 모든 방면에 탁월한 .. 더보기
프란체스카의 부활 오랫동안 서양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예기치 못한 화가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런 화가다. 전공자들도 처음엔 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자리매김된 작품들에 시선을 둔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학이나 미술사를 가르치게 되면, 미술사에서 배제된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이 생기는 것이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에 있는 ‘부활’이라는 그림은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작품 중 하나였다. 산세폴크로가 너무 외진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다빈치나 라파엘의 그림과 비교할 때 너무 조용하고 유혹적이지도 않아 재미도 감동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다른 용도로 쓰이기 위해 벽화가 지워졌고, 19세기에 회벽이 깨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해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로 떠.. 더보기
덧댐과 덧없음 그는 애초에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다룰 생각이 없었다. 2001년 불광동으로 작업실을 옮겼을 때만 해도 강홍구에게는 시골과 도시의 경계쯤에 놓인 이 지역이 그저 흥미로웠을 뿐이다. 예상 밖의 근사한 녹지, 그 주변부의 정감어린 촌스러움, 그럼에도 서울시라는 행정 구역이 갖는 도시적 욕망. 이 묘한 지역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인 그의 기록 본능을 부추겼다. 그렇기는 해도, 본래 창작 활동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딱히 이 기록에 특별한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2004년 은평 뉴타운 계획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갑자기 매일같이 보던 익숙한 풍경이 살풍경으로 변하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재개발의 현실을 오랫동안 기록해온 뛰어.. 더보기
“이 집은 당신만의 집이 아닙니다”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이 덧대어져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가져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더보기
섬세와 실용의 속 깊은 만남 미국 뉴욕에 가면, 마치 숨겨놓은 애인을 만나듯 홀로 은밀히 다녀오는 곳이 있다. 맨해튼 최북단,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클로이스터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분관인 클로이스터는 프랑스에 있던 중세 수도원 몇 개를 가져와 그대로 재조립한 중세 유럽예술의 보고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로베르 캉팽의 ‘수태고지’다. 플랑드르의 거장인 캉팽은 인류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러 온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을 1400년대 플랑드르 지방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기증자인 잉겔브레히트 부부로 당시 유명 상인이다. 상인계급의 봉헌자들은 수태고지의 순간이 마치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으며, 그 순간을.. 더보기
고고학 제목은 꽤 거창하다. 거기에 속아 실제 작품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디에 쓰는 건지도 모를 물체들이 고인돌이나 탑처럼 심각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가벼운 말장난에 속은 기분이지만 작품이 풍기는 진지함에 대놓고 딴죽을 걸 수는 없는 상황이랄까.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고고학’을 위해 사진가 권도연은 아이들의 역할 놀이처럼 스스로 고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함께 사는 강아지를 데리고 놀이터로 산책을 나가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으니 말이다. 주택가 땅 밑에는 스티로폼, 컴퓨터 부품, 캔 등 고만고만한 물건들이 숨어 있었다. 때로는 땅 위에서 말라비틀어진 무나 지우개 따위를 덤으로 얻기도 했다. 작가의 눈속임은 감쪽같아서 버섯처럼 보이는 고인돌은 스티로폼이고, 무처럼 보이는 녀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