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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디 노토는 ‘본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는 젊은 사진가다.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목격 혹은 기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더 크게는 본 것을 기억하고 본 것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적인 태도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사진가들이 이 말에 유독 민감하고 괴로워하며 끊임없이 그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가는 것과 보는 것의 연관성은 어떻게 될까. 반드시 현장에 가서 본 것만이 진정성을 지니는 것일까. 가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혹시 습관처럼 사건을 ‘채집’하려고 가는 것은 아닐까. 조르지오는 ‘아랍의 봄’ 때 그곳에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혁명의 열기와 상처, 절박한 외침을 인.. 더보기
위험을 무릅쓴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는 그림 마크 로스코의 실물 회화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체험을 쏟아놓는다. 명상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는가 하면, 펑펑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진정 로스코의 추상회화는 망막을 혼란시키는 동시에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림에 속한다. 그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자살했기 때문일까? 색면화가인 로스코는 소위 드리핑(물감을 떨어뜨리거나 흩뿌리는 기법) 화가인 잭슨 폴록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의 독보적 존재이다. 추상표현주의란 무엇인가? 형식은 추상이지만, 내용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태어난 추상표현주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미술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중에서도 색면 화가들은 전쟁의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실존적 입장에서 좀 더 근원적이고 강렬한 색면.. 더보기
코트디부아르 미장원 머리 모양이 첫인상의 7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정확한 수치는 아니더라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아버지가 아프리카 태생인 에밀리에 레그니에의 무용담을 듣다 보면 흑인 여성이 곱슬머리에 대해 가지는 애증이야말로 남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빗지 않아도 찰랑거리는 금발이었는데, 캐나다 학교에서 유일한 흑인 아이였던 에밀리에의 곱슬머리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어서 그녀는 늘 번개처럼 뻗친 머리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촬영차 코트디부아르에 갔다가 미장원에서 반가운 풍경을 목격했다. 탈색으로 머리칼 색깔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모양의 가발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비욘세 같은 외모를 .. 더보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이상향으로 번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두 단어를 합성해서 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갖지만 U는 뜻이 모호하다. 그리스어 eu, ou는 다 같이 ‘유’로 발음되는데,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라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고 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로부터 떨어진 섬이어서 이곳을 가려면 배를 타고 하나의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더보기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소경들의 행진이 불안하다. 맨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소경이 넘어지자 그를 믿고 따르던 소경도 앞으로 쓸리며 넘어지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소경들은 곧 자신이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눈치다. 다양한 표정의 얼굴에는 무지에서 오는 천진함까지 엿보인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실제 맹인의 처지는 더 이상 신의 기적을 증거하기 위한 상징적 존재가 아닌, 동정조차 받을 수 없는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그림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성서의 내용을 담은 것이다(마태복음 15장14절, 누가복음 6장39절). 이 말은 원래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우매함을 지적한 말에서 유래하는데, 지도자가 잘못되면 따르는 사람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6세기 플랑드르 .. 더보기
아직 여기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육체적으로 소멸해 가고 있다. 아무런 기력도 없이 그러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숨이 거두어질 그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그가 머무는 방 안으로는 여전히 햇살이 일렁이고 마당의 나무는 싱그러우며 거실 안으로는 간간이 벌들이 찾아들어온다. 그는 아마도 이 시들지 않는 자연들 품으로 곧 돌아갈 것이다. 그의 감긴 눈과 파인 주름, 성긴 머리칼은 지켜보기에 고통스럽지만 희미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가 느리게 내뱉는 숨은 예순에 얻은 딸과 스물네 살 연하의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다. 그는 가족들에게 시간과 자연의 엄숙함에 대해 온몸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딸, 리디아 골드블라트는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조용히 목격한다... 더보기
유혹의 메타포, 세이렌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 속 존재는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세이렌은 가장 유혹적이고 환상적인 존재다. 고대의 세이렌은 여인의 머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중세의 세이렌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 물고기 꼬리를 한 좀 더 에로틱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신비한 바다생물체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다. 이것으로 남자들을 유혹했고, 유혹의 끝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유혹당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으니, 오디세우스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유혹당하고 싶어 했고, 유혹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바로 귀향길에 억류되었던 섬의 마녀 키르케가 알려준 비법 때문이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의 섬을 지날 때 밀랍을 이.. 더보기
짧은 행복 영국자연사박물관은 매년 ‘올해의 생태사진가’ 상을 제정해 수상작을 전시한다. 지난 화요일 이 상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상식과 함께 전시도 막을 올렸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수여하는 대상은 생태사진가 마이클 닉 니콜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위해 세렝게티국립공원의 사자 무리를 2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사진 속 풍경은 자신들의 왕국에서 편안히 잠든 사자 떼처럼 보인다. 사자들이 널브러진 바위 둔덕 옆으로는 물 웅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 뒤편 저 멀리 신의 축복처럼 늦은 햇살이 쏟아진다. 궁금한 것은 마치 거실 소파 위 고양이들처럼 사자 떼가 코앞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다. 닉과 촬영팀은 트럭에 몸을 숨긴 채 사자가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발치까지 .. 더보기
아스파라거스에 얽힌 화가와 컬렉터 그림 그 자체보다 그림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를 반추하는 일은 그림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오늘날처럼 예술가에 대한 에피소드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더욱더 그런 스토리가 그리워진다.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로 유명한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아스파라거스’에 얽힌 에피소드가 꼭 그렇다. 어느날 한 컬렉터가 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그림을 사갔다. 그런데 그 컬렉터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200프랑을 더 얹어주었다. 모두 깎으려고만 하는 세상에 그림이 좋다고 기분 좋게 웃돈을 더 얹어주다니, 참으로 드문 일이 일이 아닌가! 이럴 때 수집가는 예술가보다 한 수 위인 예술가가 된다. 그러자 마네는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만 있는 그림을 따로 그려 보내면서, “선생님이 사 가신 그림에서 한 줄기가.. 더보기
창세기 세바스티앙 살가두는 움직임이 굵직한 사진가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극한의 노동을 감행하는 ‘노동자’와 전쟁과 기아로 터전을 등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민’ 연작으로 인류에 관한 대서사시를 사진으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웅장한 구도를 지닌 흑백 사진은 슬픔과 고통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시각적으로 빨려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로 인해 비극마저도 너무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진가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런 그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기사를 10년 전쯤 처음 봤다. 당시 그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넘어 이제는 자연의 위대함을 다루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삐딱한 마음 탓일까. 인간의 고통에서 시작해 자연의 숭고함으로 끝나는 것은 너무 기독교적인 발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필 새 .. 더보기
너무 닮아서 낯선 극사실 회화가 있듯이 극사실 조각이 있다. 마치 영국의 밀납박물관 ‘마담 투소’에 가면 볼 수 있는 유명스타들의 인형이 바로 극사실 조각에 해당한다. 그곳에 가면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 클린턴에서 부시에 이르기까지 유명스타 인형들이 진짜처럼 우리를 반긴다. 어찌나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지 정말 기이하고 섬뜩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인형들을 예술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예술적 맥락 안에 놓여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술은 모방 혹은 재현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호주 태생의 론 뮤엑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인형을 기막히게 잘 만들어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에게 사사한 후 영국으로 건너가 어린이 대상 TV와 영.. 더보기
필름 속 사건 그는 어둠이 내리자 후미진 골목 식당가를 거닐었다. 프랑스에서 온 그에게 네온사인이 화려한 간판들은 낯설고 이국적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다음에 유리문이 젖혀진 어느 건물의 실내에 눈길을 빼앗겼다. 다만 식당가를 찍은 직후였는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동선과 관심사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필름이 말해주는 단서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필름을 현상하자 분명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빛은 새어 들어왔고, 마지막에 찍은 실내는 절반만 남아 있던 필름 속에서 잘린 채로 존재하고 있다. 네거티브 필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의도치 않았기에 분명 ‘네거티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필름이 사진기라는 기계 속에서 스스로 일으킨 화학적 사건의 결과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두 겹의 시간과 공간이 .. 더보기
메두사, 양성성의 신화 애초 아름다운 처녀였던 메두사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동침한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처녀신 아테나는 결혼을 염두에 둘 만큼 포세이돈을 사랑했지만, 그는 아테나에게 별 매력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런 포세이돈이 메두사라는 묘령의 여인과 정사를, 그것도 자기 사당에서 치렀다는 사실은 아테나를 엄청난 질투와 분노에 떨게 했다. 결국 아테나의 저주로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뱀들로 변했고, 얼굴도 흉측하게 변해버렸다. 이때부터 메두사의 시선과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돌로 변했다. 훗날 메두사는 아테나와 공모한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의 경고에 따라 그녀를 직접 보지 않고 방패에 비추어 보면서 죽여야 했다. 그 머리는 아테나의 방패 혹은 옷에 장식되었다. 바로크 화가들은 이 드라마틱한.. 더보기
마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1829년 창간했다.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는 신문 중 미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되었다. 퓰리처 언론상을 17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다. 1925년에 세워진 이 언론사의 사옥 또한 필라델피아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정론지도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언론인 20%가 매체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또한 2011년 새로운 사주를 맞이했고, 그해 11월 사옥 매각이 결정됐다. 사진가 윌 스테이시는 이 언론사가 급변하던 2009년부터 신문사가 이전을 한 이후까지 신문사를 내밀하게 기록해 왔다. 아버지가 평생 동안 근무하던 회사였기에 섭외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마감’이라는 제목의 이 작업은 18.. 더보기
철의 바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적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 철을 물결처럼 만드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무겁고, 거칠고, 위험해 보이는 철로 부드럽고, 유약하고, 아름다운 조각을 만든다. 마치 내 마음대로 안되는 상대를 구슬러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미술에서는 딱딱한 물질을 부드러운 물질로 바꾸고, 작은 물건을 큰 물건으로 바꾸어 놓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크게 감동시킨다. 현대미술은 발상의 전환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세라는 영문학도 출신으로 예일대 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때 생계를 위해 제철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의 세라를 있게 한 소중한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200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재개관 기념전의 단독 작가로 초대되었다. 세라의 두 번째.. 더보기
삼분의 일 지구 위 9억명이 넘는 인구가 굶주림에 위협받고 있다. 반면 1년 동안 전 세계 식량의 3분의 1이 버려지거나 손실된다. 유엔 농업식량기구의 2011년 연구에 따르면 대략 13억t이 이렇게 사라진다. 잘사는 나라는 음식물 쓰레기를 걱정하고, 못사는 나라는 기술 부족으로 인해 생산 과정에서 손실되는 식량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북미에서는 소비자 한 명당 1년에 평균 100㎏의 식량을 버린다. 그들의 반대편 나라보다 최대 20배 많은 양이다. 부의 불균형은 이렇게 밥상에서부터 일어난다. 클라우스 피클러는 이 음식물 쓰레기에 관한 작업을 하는 작가다. 현실 참여적이지만 방법은 선언적이지 않다. 그는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와 본래 식탁에 있었을 법한 모습대로 혹은 최대한 먹음직스럽게 꾸며 놓는다. 헝가리산.. 더보기
메아리와 수선화 강의 신 케피소스가 강의 요정 리리오페를 감싸안았다. 리리오페는 달이 차올라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어찌나 예쁘던지 보는 사람들마다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그런 까닭에 이름을 ‘망연자실’, 즉 ‘나르키소스’라고 불렀다.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가 평생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나르키소스의 미모 속에 도사린 파괴적 결말을, 그의 불운한 운명을 직감했던 것이다. 어느 날, 헤라의 징벌로 반벙어리가 된 요정 에코가 나르키소스를 보고 반했다. 얼씬거리며 말을 걸고 싶었지만, 나르키소스의 말만 따라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조롱한다고 생각, 자기 손을 잡는 그녀를 뿌리치며 매몰차게 떠났다. 에코는 고독 속에 나날이 야위어갔고, 결국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었다... 더보기
진짜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 막스 에른스트, 이번 주의 친절, 1934년, 석판화독일 태생의 막스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자 중의 초현실주의자다. 그는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마니아들은 그를 최고의 초현실주의자로 간주한다. 에른스트는 프로이트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프로타주(frottage: 문지르기)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년 시절 그는 마룻바닥에 종이를 대고 긁으면 나타나는 형상에 매료되었다. 그것을 무의식의 자동기술법이라고 생각했다. 에른스트의 작품에 집요하게 드러나는 어떤 형상이 있다. 새 부리 형상을 한 로플롭이다. 이 새 인간은 에른스트가 개발한 분신이자 페르소나다. 마치 마르셀 뒤샹이 로즈 셀라비라는 여자를 만들어낸 것처럼. 에른스트는 유년 시절 사랑했던 .. 더보기
팬톤표 얼굴색 미국 팬톤사가 만든 팬톤 컬러 가이드는 가장 과학적인 색채집이다. 색마다 알파벳과 숫자로 고유 번호를 붙인 이 색표들은 인쇄, 페인트, 패션 등 정교한 색의 구분이 필요한 모든 산업 영역의 표준으로 통할 정도다. 유광과 무광으로 나뉜 이 색채들은 각각 1000가지가 넘는다. 팬톤 컬러는 언어에서의 흰색이 시각적으로는 결코 같은 색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올해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에 참여하는 브라질계 사진가 안젤리카 다스는 이 과학적 색채표를 사람에게 적용했다. 작가는 우선 각 인물을 찍은 뒤 그 주인공의 얼굴에서 추출한 11×11픽셀의 견본과 정확히 일치하는 팬톤의 색을 골라낸다. 그 다음 사진의 배경색을 포토샵을 통해 이 팬톤 색으로 바꿔 넣는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 더보기
밀레보다 더 유명한 밀레가 활동했던 시절, 그의 ‘이삭줍기’보다 훨씬 더 인기 있었던 그림이 있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인 쥘 브르통(Julles Breton)의 그림인데, 당시 살롱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황량한 들판의 저녁 무렵, 남루한 복장의 한 무리 여성들이 짚단을 이거나 든 채 걷고 있고, 몇몇은 아쉬운 듯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이삭을 줍고 있다. 여인들은 추수가 다 끝난 대지주의 밭에서 바닥에 흩어진 지푸라기를 주우러 온 가난한 농민들이다. 사실 이 풍경 속에는 짠한 스토리가 숨겨 있다. 당대 프랑스 소작민들은 추수 후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갈 수 있도록 허락됐지만, 동시에 이삭줍기는 가장 천한 일로 여겨졌던 것. 이 작품을 두고 당대 보수적 비평가들은 사실주의의 정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혹 그들이 칭송한 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