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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앉아 여유로이 평온에 젖어 있는 아내와 딸. 코타키나발루. 2017. ⓒ임종진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의 밀착감이 한몸으로 느껴질 만큼 보기에 좋았다. 요동도 거의 없었다. 아이가 엄마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엄마가 아이와 눈빛을 맞추는 정도의 움직임이 잠깐 있기는 했으나 몸짓의 변화가 크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고요함에 거의 가까웠다. 그 고요 속에 나는 없지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간간이 뒤를 돌아 내 눈빛에 섞이기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두 사람은 파도 건너 저 먼바다 끝을 향해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두 사람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내내 나는 두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궁금하기는 했다. 대체 무엇을 그리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말을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디를 보든 무엇을 보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뿌듯한 평화가 내 감정을 일렁이게 했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아늑함에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었다. 


몰입의 즐거움은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오는 바다의 파열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득문득 양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유혹도 있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하염없이 커져갔다. 정지된 화면처럼 숨죽인 고요 속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앉아 있을 뿐 우리 셋은 한 공간에서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곁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의 아내와 딸이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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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 (45x53cm)


정보가 넘쳐나고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보아야 할 것, 읽어야 할 것,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조금이라도 멈추고 딴짓하다가는 이 급박한 시대에서 뒤처져 버립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요즘 새로운 것들을 익히고 알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점점 그 속도는 늦어지고 있습니다. 한번 뒤처지면 다시 따라잡기는 힘들어진 요즘 시대 덕분에 억지로라도 머리와 눈과 손을 움직이며 이 시대의 속도감을 익히고 있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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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 ⓒ 최병수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가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동시대까지 격동의 근·현대사 100년을 미술의 언어로 풀어낸 300여 작가의 작품 45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근·현대사를 골격으로 예술가와 작품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그려왔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재생적, 창조적으로 상상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 아래 광장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우린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한국 근·현대사를 서술하는 중심어로 ‘광장’을 내세운 건 “한국사의 역동성을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켰던 지점”(국립현대미술관 강승완 학예연구실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부패한 밀실의 남한 사회와 타락한 광장의 북한 사회에 모두 실망하여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투신한 이명준을 주인공으로 한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등장하는 밀실과 광장을 통해 대립의 해소를 통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1부인 덕수궁관 전시에는 예술로 민족혼을 강조한 1900~1950년대 작품들과 망국(亡國)의 시대를 살다 간 민족투사들의 지조와 절개가 놓였다. 채용신이 그린 구한말 우국지사들의 초상과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사대부들 및 의병들의 작품, 서양미술의 유입 속에서 조선의 전통 미학을 지키기 위한 고민이 묻어나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2부 과천관은 한국전쟁~현재까지의 미술을 통사적으로 다룬다. 근대화, 민주화, 세계화를 화두로 전쟁의 상흔과 민주화 투쟁을 거쳐 새로운 도약을 일군 70년의 역사가 담겼다. 군사정권에 의한 경제개발과 독재라는 극단의 그림자에 짓눌린 격정적 투쟁과 논쟁의 시대였던 1980년대 작품들을 비롯해 이념체제의 붕괴, 자본주의의 도래, 외환위기 속 위기에 처한 민초들의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1990년대 작품들까지 다양하다.


이 중 1980년대 당시 광장을 옮긴 최병수의 대형 걸개그림 ‘노동해방도’와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공동공존의 삶과 민주화를 향한 목숨 건 저항을 보여주고, 미시사적 관점에서 세계를 재해석한 작업들에선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한 징후를 읽게 한다. 특히 베트남전쟁과 5·18민주화운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은 역사적 상처를 어루만지는 수준을 넘어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드리운 비극적 현실을 곱씹게 한다.


3부 서울관은 현재의 광장은 어떤 것이고, 미래의 광장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쉼 없이 자행되는 부조리와 불평등에서부터 난민, 생태, 재난 등의 단어가 부유하는 가운데 개인과 공동체, 실존과 타자, 주체와 객체 같은 명사들이 밀실과 광장,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경계 없이 오간다.


결과적으로 ‘광장’전은 역사와 미술의 상관성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그만큼 볼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서울관의 경우 짜임새가 헐겁고, 과천관은 의미 대비 너무 많은 작품을 몰아넣었다. 중복되는 작가도 여럿 된다.


그러나 가장 거슬리는 건 전시를 통해 사회라는 거대한 광장에서 부조리에 대항하며 정의가 살아 있는 공평한 세상을 지향했던 예술인들을 호명하고 있지만, 정작 불공정한 관장 임명 논란과 같은 국립현대미술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선 침묵해왔다는 점이다. 서푼짜리 밥그릇을 대신할 용기도, 광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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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설근체조, 2019. ⓒ 박해욱


혀의 움직임은 당신의 표정을 바꾸고, 턱선을 바꾸고, 얼굴형을 바꾼다. 몸짓을, 말투를, 음색을, 발음을, 어쩌면 마음의 위치를 바꾼다. 유연한 세치 혀라면, 당신 아닌 타인의 마음마저 능숙하게 움직인다. 혀가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다면, 운동성을 과시하면서 어설프게 움직인다면, 그 혀는 당신의 치열을 밀어내고, 구강구조를 망가뜨리고, 숨쉬기마저 방해할 것이다. 그런 혀일지라도 단맛, 짠맛, 쓴맛, 신맛을 보겠고, 말을 쏟아 내겠고, 타인의 마음을 유린할 테지만, 그런 혀는 마침내 당신의 턱관절을 비틀고, 얼굴의 윤곽을, 몸통을 뒤틀고 말 것이다.


어느 날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이윤정은 혀뿌리를 움직여보던 중, 혀근육이 턱근육, 심장근육, 전신으로 뻗어 있는 온갖 근육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혀뿌리를 움직이자 내장기관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혀의 근육을 의식한 뒤로 그에게는 온몸의 근육운동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움직임이 이끌어내는 표현의 세계, 그 당위성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혀는 늘, 원래 하던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혀의 운동은 과거와 달라져 버렸다. 제12뇌신경이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혀근육으로는 미처 춤추지 않았던 무용수가 이제, 혀뿌리로부터 춤을 추기로 한다.


‘설근체조’라 명명한 퍼포먼스의 시간, 무용수의 입안에서 왼쪽 오른쪽 위아래, 다시 치열을 고르며 워밍업을 시작한 혀뿌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발음하며 낯선 움직임을 훈련한다. 혀의 운동은 이제 목으로, 어깨로, 손으로, 몸통으로, 다리로 이어져 온몸의 근육으로 퍼진다. 내장기관이 꿈틀댄다. 매끈한 얼굴 아래, 목구멍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혀의 존재를 의식하니, 댄서의 움직임이 다르다. 목구멍 너머의 세계를 온전히 고려하면서 바라보는 시간이 만드는 긴장감에 혀뿌리의 침은 마를 새가 없다. 척추동물의 입속에서 꿈틀대는 30㎝짜리 근육다발이 끌고가는 춤 앞에서, 이유가 있는 움직임이 비로소 아름답다는 것을 알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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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 도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안개 속 도시풍경. 2019. 파주. ⓒ임종진


바람 시린 날이 점점 늘고 있다. 11월이 아직 며칠 남아 있는데 목을 타고 스미는 기운이 한겨울처럼 제법 차다. 굳이 연결지을 일은 아니겠지만 가슴에도 시린 바람이 자꾸 타고 든다. 최근 들어 가까이 여기는 지인들의 전화나 만남의 시간들이 연이어 그리고 긴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화내용은 모두 자신의 현실에서 빚어지고 있는 슬프거나 마음 아픈 일들이다. 얼마나 답답하면 나를 찾을까 싶어 두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그들을 대하려 애를 쓴다.


며칠 전에도 귀히 여기는 한 지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주 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는 늘 함께하는 후배이자 인생친구라 여기는 사이였다. 웃을 일이 없는 구닥다리 농담으로 늘 쾌활하게 말을 건네던 그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가라앉아 있기에 금방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너머로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갑자기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궁금함이 컸지만 그의 눈물이 멈추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성급히 이유를 묻거나 섣부른 위로로 그를 보챌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연이든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내게 스며든 탓이기도 하지만 실제 마음의 곁을 나누며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듣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말이라도 몇 마디 털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위안이 될 일이라면 다행이라 안도할 뿐이다.


차가운 계절이 다가와서일까. 가슴 시려 하는 이들이 주변에 자꾸 보인다. 별반 도움이 될 노릇은 없지만 그저 힘들 내시라고 어깨 한번 다독이고 싶다. 짙게 드리운 장막이 걷히고 나면 원래의 환한 세상이 한결 눈에 보인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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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아크릴(40×30㎝)


안 잡아먹어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냄새도 안 나고 이상한 짓도 안 해요. 겉보기엔 좀 그래도 마음은 착해요. 피하지 마세요. 최대한 팔다리를 모으고 조용히 잠자고 있을 테니 그냥 사람으로 대해주세요. 안 잡아먹어요. 저 괴물 아니에요.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자들이 아저씨 옆의 빈자리에는 잘 앉지를 않습니다. 여자는 여자들끼리 모여 앉고, 아저씨들은 아저씨들끼리 끼여서 앉아 있습니다. 가끔 여자들 사이의 빈자리에 앉으려면 양쪽에서 째려보는 눈빛이 느껴집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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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프랑스 몽티냑 마을 소년들이 강아지를 찾던 중 거대한 벽화가 그려진 동굴을 발견했다. 이 동굴이 그 유명한 ‘라스코 동굴’(사진)이다. 약 2만년 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는 원시미술을 대표한다. 벽화에는 말과 사슴 등 여러 동물이 등장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동물은 머리에 뿔이 달린 가로 길이가 약 4m인 소이다. 이 소는 오록스종으로 스페인 투우에 등장하는 거친 황소들의 조상이다.


구석기인들은 왜 거대한 소를 그렸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그 이후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약 1만년 전 차탈회위크 유적에 거대한 소를 그린 벽화가 있다. 학자들은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소를 숭배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약 5000년 전 크레타섬의 신화에 전설적인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등장한다. 머리는 소이고 몸은 인간인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 문명의 상징이었다. 미케네 문명의 왕자 테세우스는 이 상징을 죽이고 미노스 문명을 정복한다. 이후 그리스 문명의 신들은 동물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갖는다. 


인류의 대표적 문자인 알파벳 ‘A’는 본래 소를 의미하는 기호였다. 문자에서조차 소가 가장 첫머리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소는 인류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몇몇 평론가는 가상과 현실을 토대로 라스코 벽화의 동물들이 가상의 사냥감이라고 말한다. 그림 가운데 있는 붉은 사슴은 사냥감이 맞다. 하지만 거칠게 달려가는 소의 경우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라 쇼베의 동굴곰처럼 라스코 동굴의 상징이자 숭배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굴벽화에는 소가 많이 등장한다. 구석기인들에게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고 농경시대에는 친숙한 가축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저 음식 재료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인류에게 신성하고 친숙했던 가축들이 공장에서 사육되고 도축되면서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인간이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운명이 달라진 것이다. 신에서 스테이크로 추락한 소를 떠올릴 때마다 디자인에 있어 가치 기준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다. 때론 잔인하게 느껴진다.


<윤여경 디자인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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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019, 영상, 30분34초 ⓒ무진형제, 아트스페이스 풀


멕시코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마침내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청새치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가 보다. 그는 청새치의 살점을 상어 떼에게 고스란히 뜯기고, 앙상한 뼈만 매단 채 돌아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성공의 기억을 뒤로하고 노인은 피로한 몸을 뉘었다.


‘길 위쪽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작가그룹 무진형제는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으로 적은 것을, 낡은 집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시작한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오래된 집, 오래된 땅, 오래된 삶, 오래된 기억의 안팎을 엮어 나가는 영상 설치 작업 안에는 시공간 안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삶이 쌓인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의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의 주름진 살결, 깊게 휘어진 손가락에 가 닿았다. 말 그대로 ‘고목껍질’ 같은 노인의 피부는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이제 그는 격정의 시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세월을 새긴 듯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우편물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고요하고 담담한 것이, 그저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좋겠다.


사람은 늙고, 땅의 쓸모는 변하지만, 그저 이곳에 그대로 있고 싶은 자의 마음은 가만히 있다. 그를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늙은 자의 그 마음을 만났을까. 노인이 꿈꾸었을 ‘사자’를 만났을까.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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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로 알려진 폭압의 시대를 마치고 지난 30년 동안 장애를 지닌 수많은 이들과 함께한 ‘반티에이뿌리웁 지뢰피해장애인기술센터’ 재봉프로덕션에서 일하는 ‘소피아’. 2011. 캄보디아. ⓒ임종진


굶주리는 이들 앞에 서서 배가 얼마나 고프냐고 이제 묻지 않는다. 절망과 고통에 쌓인 이들 앞에 서서 얼마나 살기 힘드냐는 질문도 하고 싶지 않다. 병들어 누워 있는 이들 앞에 서서 어느 정도 아프냐고 물을 생각 또한 없다. 장애를 지닌 이들 앞에 서서, 그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묻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는 질문은 정말이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한때 그런 질문과 염려에만 거의 100% 기대고 매달려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답을 들은 뒤 마치 세상을 다 바꾸어줄 듯 섣부른 약속으로 그들을 탐해왔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지난 나의 시간들이 몹시 부끄럽고 안타까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금은 질문의 내용과 방식이 바뀌었다. 고단한 인생살이의 수위와 척도를 묻는 질문 대신 살며시 곁을 지키거나 함께 걷는 일이 더 많다. 말을 건네야 할 때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때를 구분하면서 의미 없는 충고와 조언 따위로 마음을 훔치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시선을 거두지 않거나 귀 또한 열어둔 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렇게 시간이 채워지면 보이지 않던 귀한 삶의 형태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나의 작은 심장은 그 형태에 쿵쿵 울리고 들뜬다. 이러한 지금의 내 심장은 10여년 전 캄보디아의 한 지뢰피해장애인기술센터에서 1년 동안 머물렀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몸의 일부는 잃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는 것에 아무런 저해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가는 그들의 모습을 감동스럽게 지켜본 때문이다. 올해 마지막 달에 다시 이곳을 찾아간다. 옛 친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해후를 나누고 오랜만에 그들의 곁에 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들썩거린다. 미리 가늠만 해도 기분이 들뜬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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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민의 생각그림

나무에 아크릴 펜(20×39㎝)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며 마음이 설렙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아쉬움만 가득 남습니다. 그때 그걸 했어야 하는데, 미리 알아볼 걸,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꼭 먹어보고 왔어야 하는데, 담에 갈 때는 꼭 해야지…. 그렇게 다짐을 해보지만 똑같은 곳을 다시 가기에는 못 가본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아쉬움만 잔뜩 남기고 또다시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고 있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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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장면, 참여 작가만 무려 160여명에 달했다.


우연히 일본의 트리엔날레 ‘오카야마 아트 서밋’(Okayama Art Summit, 9·27~11·24)에 대한 보도를 접했다. 기자의 관점이 그러했듯 나 또한 국내 사례를 대입하면 너무도 확연해지는 여러 문제점을 이 기사로 인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선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이 전시는 국제행사치곤 참여 작가의 수가 17명에 불과해 양으로 승부하는 한국의 비엔날레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는 160여명이었고, 같은 해 열린 부산비엔날레는 줄이고 줄였음에도 66명에 달했다. 심지어 얼마 전 막을 내린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작가 수가 무려 1200명을 웃돌아 기사에서 표현된 ‘규모강박증’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공개된 자료만 봐도 ‘오카야마 아트 서밋’은 작은 규모 대비 이색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일단 2017년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 ‘앞선 삶 이후’(After Alife Ahead)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여 크게 주목받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가 예술감독을 맡아 시선을 끈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면면이 녹록지 않다. 레바논 출신의 사운드 아티스트 타렉 아투이를 비롯해 빼어난 쇼맨십과 기발한 착상으로 전시할 때마다 시끌벅적한 이슈를 만들어내는 매튜바니가 참여해 개성 있는 무대를 꾸렸다. 연출된 상황을 이미지의 거세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현대무용가 출신의 티노 세갈이 함께하면서 전시의 풍요로움을 더했다.


이 밖에도 시간과 같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물질화하는 페르난도 오르테가,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한 컴퓨터 제너레이티드 아트를 미술언어로 삼는 이안 쳉 등 유명과 무명을 넘나드는 작가들이 일당백으로 역할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 일본 작가는 없다. 물론 세계 최고의 미술행사인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주최국 이탈리아 작가는 손에 꼽혔고, ‘하우프트반호프’에 작품을 내건 카셀도큐멘타14 작가 가운데 독일 작가는 아예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견줘 새로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미술행사의 경우 반드시 한국 작가, 아니 ‘지역 출신 작가’가 끼어 있다. 작품성과 주제에 부합한다면 지역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그게 아니라 단지 개최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전시에 넣곤 한다. 그러하지 않을 경우 ‘지역 소외’ 운운하며 반발한다.


스스로를 ‘지역작가’로 묶는 아둔함, 우리 지역에서 우리 세금을 사용하니 우리 지역 작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극히 단순한 셈법을 보면 매우 촌스러운 태도이지만 우린 그 딱한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다. 지금도 이런 양태가 이어지고 있고, 내년 일제히 개최될 여러 비엔날레를 통해 다시금 증명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작가들은 그런 수혜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예술성에 관한 가치구분에 따른 정당한 개입과 평가를 지향한다. 하지만 지역에서 나름 힘깨나 쓴다는 이들은 헤게모니의 견고함을 위해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행사를 연고주의 혹은 거소(居所)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현재 전국에서 비엔날레 준비가 한창이다. 부디 이번엔 행사와 지역성 모두를 망치는 연고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지역작가 육성이라는 명분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덩치만 키운다고 의미 있는 행사가 되는 것은 아님을 자각했으면 한다. 이런 글 하나로 그들의 사고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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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7획, 2018, 캔버스에 템페라, 120×100㎝ ⓒ 송현숙, Zeno X Gallery


캔버스 천 위를 스치는 화가의 붓질은 또 다른 결을 만든다. 한때, 송현숙의 붓질은 삼베나 모시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빛을 거의 굴절시키지 않아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낸다는 템페라 특유의 딱딱한 색조가 식물성의 담백한 질감에 닿아 있었다. 이제 그의 ‘획’은 식물의 뉘앙스를 넘어 실크 특유의 동물성 광택마저 담는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하나의 붓질은 농사를 지으며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항아리의 형태가 되었다. 


안료를 달걀, 송진, 물과 기름에 혼합하는 시간, 그는 생각을 채우거나 비우기를 반복할 것이다. 곧 마주할 빈 캔버스 위로 기록할 숨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걷어내기를 반복할 것이다. 어떤 결정을 마치고 나면, 또 하나의 손처럼 호흡을 맞춰 왔을 크고 납작한 붓을 들고 한 호흡에 한 획을 긋는다. 수정하기 곤란한 그 순간의 움직임이 한 번 살아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결정들처럼 캔버스를 덮는다. 


그의 작품은 별도의 제목을 취하기보다, 호흡과 획이 스쳤을 숫자가 된다. 태어나면 소멸하고 마는 목숨들의 운명처럼, 단순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담백한 선택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기꺼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생사의 속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예술에 집중을 하되, 세상과 일상을 외면하지 않으며 분노할 줄 아는 작가의 현실감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입으로 허무하게 설명하는 수행이 아니라 ‘화면’이 포착한 그 수행의 숨결은 쉽게 외면할 수 없다. 유기물과 무기물이 순환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곧 소멸할 인생을 반복해서 그으며 역사를 만드는 생명의 몸짓처럼, 획 하나에 모든 것을 내거는 일은 무겁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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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4159번지의 방치된 땅에 솟은 듯 있는 봉우리. 2019. 제주. ⓒ임종진


땅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요동 하나 없이 가만히 ‘서서’ 분명 울고 있었다(라고 느껴졌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모른 척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시선을 고정한 채 나 또한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허허벌판에 내쳐진 듯 보이는 몰골을 보며 이 땅이 토해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 한라산 아래 중산간을 이루는 조금 솟은 평지였거나 작은 둔덕이었으나, 최근 개발업자들에 의해 사정없이 파헤쳐지다가 어인 일이지 살아남은 자연 원형의 일부였다. 생긴 모습은 언뜻 소박하게 솟은 작은 봉우리 같았다. 대략 2~3m의 높이로 둘레는 양팔을 벌려 두어 번 돌면 가늠할 만했다. 굉음 속에 마구 깎이고 갉혀나갔을 순간들이 고스란히 눈에 보여서일까. 참으로 처연하고 구슬펐다. 이대로 방치된 채 오랜 시간이 흘러왔다. 한순간에 작은 봉우리가 된 이 땅은 수년이 흐르는 동안 홀로 비와 바람을 견디고 서서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바로 인근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람사르습지가 있는 이 땅 주변으로 이런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개발광풍이 한번 몰아친 곳이어서일까. 소식을 들으니 앞으로 이 지역 총 58만㎡ 부지에 동물테마파크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다시 삽질이 시작된다면 아마 이 봉우리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땅의 눈물은 그렇게 사라짐으로써 멈추게 될까.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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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 (41×53㎝)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입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각양각색의 예쁜 단풍, 상쾌한 가을바람, 사람들의 멋진 가을 옷차림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다 풀어 버리고 즐겁게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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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루비우스가 <건축 10서>에서 ‘인체 비례의 규칙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고 쓴 대목에 영향을 받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창조는 모방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학습들, 즉 이전 것들의 모방을 통해 한 분야에서 숙달된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세상에서 완벽히 독창적인 것은 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고의 수단인 언어나 문자는 모두 기존의 것이며 그 결과물 또한 지나온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기 힘들다. 대체로 우리는 이전 것들의 색다른 조합이나 덧댐으로 새로움이라 부르는 것에 한 발짝 다가가는 식이다. 


좋은 건축을 만드는 데 있어 독창성은 필수 조건이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질서가 되는 규범이 필요하다. 과거 시대별 양식이 규범이었고 근대에 와서 기능주의가 그 역할을 하였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건축 책이라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는 로마시대인 기원전 60년경 집필되어 오늘까지 읽히는 교양서이다. 책 제목처럼 1서에서 10서까지 건축가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에서부터 재료의 선택방법, 천문학, 무기제작법,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트루비우스가 글에서 새로운 원칙을 주장할 때마다 ‘그리스에서는~’이라며 이전 시대 언급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16세기 르네상스가 끝나고 매너리즘시대에 맹활약한 건축가 팔라디오는 자신의 규범을 다시 비트루비우스에게서 찾았다. 비트루비우스의 흔적을 찾아 로마를 수차례 답사하고 많은 고전양식의 작품들과 함께 그는 <건축사서>를 남겼다. 본문에는 비트루비우스를 늘 선생 또는 안내자로 칭송하며 고대 로마 건축을 찬미하였다.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이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에 매료되어 팔라디오 양식이 새로운 시대의 규범이 되었다. 방대한 자료가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넘어가서 고전주의가 이후 미국에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세기 르 코르뷔지에도 새로운 치수이론을 만들 때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그 규범으로 삼았다. 하나 단순히 그것의 비례가 지닌 아름다움이 아니라 당시 공업화에 적용 가능한 수치시스템의 당위성이었다. 


이렇듯 그리스, 비트루비우스, 팔라디오, 영국, 르 코르뷔지에의 단속적 계보를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규범을 가까운 시대가 아닌 되도록 먼 과거에서 찾는 것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동시대 것을 따라하면 표절로 비난받지만 놀랍게도 먼 과거에서 차용하는 경우 정반대이다. 오히려 지혜가 풍부하고 기발하다며 호평한다. 독창성의 배경이 되는 규범은 가능한 한 멀리서 찾는 것이 필요조건이라면 또 그것이 누구나 공감하는 요소이어야 하는 것은 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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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상은 누구일까? 이 문제에 크게 두 가지 대답이 있다. 하나는 신, 다른 하나는 동물이다. 전자는 창조론, 후자가 진화론이다. 불과 150년 전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조상은 신이라고 믿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자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냐”며 크게 반발했지만 다윈의 진화 가설들이 검증되면서 이젠 ‘창조’보다 ‘진화’ 스토리를 믿는 사람이 더 많다.


디자인의 본질은 스토리에 있다. 인간은 경험에 기반한 상상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존재를 이야기로 구성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천년의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집단으로 결속한다. 사실 진화론도 최근의 발견이 아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진화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단군신화가 대표적이다. 단군의 어머니 웅녀(熊女)는 본래 곰이었다. 웅녀는 신의 아들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 이렇듯 단군신화는 인간이 신의 자녀라는 창조론과 인간이 동물의 자녀라는 진화론을 적절히 조화시킨 사례이다.


1994년 프랑스 퐁다르크 근처에서 동굴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동굴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쇼베 동굴’이라 부른다. 이 동굴은 지금까지 발견된 구석기 유적 중 가장 오래되었다. 학자들은 쇼베 동굴 사람들이 곰을 숭배했다고 추정한다. 발견 당시 삼각형 모양의 제단(사진 동그라미) 위에 동굴곰의 머리뼈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곰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일까. 그렇다면 동굴곰을 조상이나 신으로 여겼다는 의미다.


3만년 전의 동굴곰 제단은 진화론을 암시한다. 5000년 전 단군신화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조화를 꾀했다. 2000년 전 기독교 등장 이후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었지만 이제는 다시 진화론이 대세이다. 이렇듯 진화와 창조 스토리는 순환한다. 경험은 신화를 낳았고 신화는 신을 낳았다. 종교는 신을 근거로 진화론을 비판했고 과학은 경험을 근거로 창조론을 비판했다. 그런데 최근 발견되는 구석기 동굴은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넘어선다. 무엇이 진실일까. 누가 아는가, 빅데이터에 근거한 인공지능이 다시 창조론의 손을 들어줄지.


<윤여경 디자인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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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쥔 화가의 손은 우윳빛으로 매끄럽게 비어 있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가늠하다,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어느 지점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가볍게 짧은 빗금을 치고 시작점을 잡은 뒤, 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설원기, 2019-34, 2019, 폴리에스터 필름에 혼합재료, 61×46㎝ ⓒ설원기 이유진갤러리 제공


작은 쌀알 모양으로 출발한 선이 형태를 감싸고, 삼박자의 왈츠를 지휘하듯 일그러진 나선형을 그리면서 돌아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순간, 그의 선은 나선의 회전 궤도를 벗어나 화면을 가로지르고,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멈추었을 것이다.


이제 화가는 검은 물감을 찍어바른 붓을 들어 다음 리듬을 만든다. 먼저 그렸던 선의 흐름은 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처음 필름 위를 살피던 그 시점 그 눈으로 화면을 본다. 이번에 그의 붓은 왼편 위로 갔을 테다. 물감을 흡수하지 않는 폴리에스터 필름 위를 미끄러지며 붓은 유유히 굽이쳐 화면 아래로 내려왔을 것이다. 더 흐르기에는 검은색이 너무 투명해지기 바로 전, 다시 검은 물감을 입은 붓은 화면을 오르내리다가, 시작하던 그 지점 즈음에 올라갔을 때 멈추었을 것이다.


다시, 앞의 시간을 지운 화가는 흰 물감을 찍은 붓을 빠르게 화면으로 내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마도 다섯 번, 어쩌면 여섯 번. 그는 기꺼이 앞선 연필의 리듬과 검은 붓의 물결을 지웠건만, 이미 축적한 시간의 흔적은 그의 마지막 움직임에 개입하고 말았다. 흰 붓은 미처 마르지 않은 검은 물감을 잡아당겼으며, 마침내 화가가 붓을 뗀 화면 안에서 그는 과거의 어떤 ‘행동’도 숨기지 못했다.


각 단계의 움직임 간에 의도적인 조화로움을 만들지 않고, 각자 존재감을 갖기를, 이 화면이 특정한 ‘콘셉트’에 복무하지 않기를, “사소함이나 일상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무엇”의 상태로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한 화가의 바람은 나누고, 채우고, 찍고, 긋는 일을 통해 펼쳐졌으나, 구성의 균형을 살피고, 행위의 의도를 추적하려는 보는 자의 태도는 회화의 운명이거나, 두 눈을 가진 인간의 숙명이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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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 개악저지 집회에 참석한 한 공무원노조 노동자가 휴대폰으로 자신의 딸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2014. ⓒ정기훈


한 사람이 그가 속한 노동조합 집회에 참석해 아스팔트에 앉아 있었다. 또 한 사람인 사진가가 그의 곁에 머물며 서성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노동자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딸의 얼굴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바로 이 순간을 사진가는 놓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 거친 음성과 구호가 떠다니는 현장에서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만나 ‘사람’임을 이루는 시간을 꽃처럼 틔워냈다.


둘 중 하나인 사진가 ‘정기훈’은 늘 남다른 솜씨로 꽃을 틔운다. 머문 자리 자체가 척박하고 처절한 토양일 뿐인데도 탁월하게 틔워낸 그의 꽃들은 예외 없이 경탄스러울 만한 자태를 품는다. 콜텍, KTX, 쌍용차 등 해고노동자의 단식농성장, 광화문 세월호 천막, 일본대사관 그리고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된 낡은 미장원 등등 그가 주시하고 머무는 거리의 토양들이 대개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가 틔워낸 모든 꽃은 메마른 아스팔트를 촉촉하게 만드는 살내음으로 가득하다. 때론 아픔이 웃음으로, 때론 웃음이 아픔으로 승화된 그 향기는 오롯이 보는 이들의 시선까지 끌어안는다.


학생운동으로 젊음을 불태우던 시절, 불의의 사고로 절친한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지켜봤던 기억 탓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사람을 귀히 여기는 성정 때문일까. 그가 사람을 살피는 시선은 항상 자신과 다르지 않은 귀한 삶이라는 성찰에서 비롯되고 다시 형상으로 구현된다. 그래서 정기훈이 피우는 모든 꽃은 사람꽃이요 사진이 아니다. 사진가 정기훈을 계속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그러하다. 그의 통찰력 깊은 솜씨로 틔운 사람꽃 얘기들이 곧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사람으로 사람을 만나는 그의 시선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임종진 사진치유자·공감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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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백에 아크릴(28×32㎝)


에코백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방입니다. 가볍고 가격도 저렴해서 정장 빼고는 어느 옷에나 다 잘 어울리는 무난한 가방입니다. 가지고 있던 아무 그림 없는 에코백을 바라보다가 직업병이 발동하여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란색을 바탕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그려 봅니다. 다 그리고 나니 예쁜 노랑 가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들고 다닐 수 있었던 무난한 에코백이 그림을 그려 넣고 보니 이제는 아무나 들고 다닐 수 없는 가방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얗게 아무 그림 없던 무난한 가방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몇몇에게만 어울리는 그림 있는 가방이 좋은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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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마을은 공기 맑고 조용한 데다 교통이 편리하여 쉼과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이들이 많이 찾는다. 요양원을 비롯한 요양병원, 노인복지시설이 여럿 터를 잡고 있고, 장애인복지관 및 발달장애인 직업재활기관 역시 다수 둥지를 틀고 있다.


좁은 동네 특성상 난 그곳에 거주하는 장애인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하지만 조금의 불편함도 느낀 적이 없다. 간혹 방죽을 걷다 어정쩡한 인사를 나눈 경우는 있어도 대개는 숱하게 스치는 타인과 나처럼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존재이거나 이웃으로 여길 뿐이다.


신이피·최일준·홍세진 공동작품 ‘병풍풍경’, 영상·설치·회화, 2019


그러나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생각마저 같은 건 아닌 듯싶다. 방어적인 태도를 넘어 그들이 마을 분위기를 망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왕왕 보기 때문이다. 최근엔 시의 지원을 받아 장애인 특수학교가 세워진다는 소문에 설립 반대 시위까지 벌일 태세이다. 집값이 떨어지고 유배지처럼 인식된다는 이유이다.


장애인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복지도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거북해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내 이웃보다 내 집값을 먼저 걱정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일부 주민에게 장애인시설은 납골당이나 화장터처럼 기피·혐오의 대상인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장애인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정말 집값이 떨어질까. 2017년 교육부가 전국의 특수학교 167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전체 16개 지역 중 14개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에 변화가 없었고, 나머지 2개 지역은 오히려 땅값이 올랐다. 결국 주민들의 장애인학교 반대 주장은 근거가 없는 셈이다.


특수학교를 포함한 장애인 시설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시설로 인해 집값이 하락한다는 주장의 실체는 ‘편견’이다. 나아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비정상과 정상으로 구분하는 미성숙한 의식이 편견을 확장시킨다. 여기엔 동등한 인격체로서 공동공존의 개념은 들어 있지 않다. ‘차별’이라는 형태 없는 폭력만이 부유할 따름이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의 ‘공동창작 워크숍’은 고유한 조형방식을 넘어 새로운 창작방식과 예술적 가치탐구의 과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유무형의 경계를 허무는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조경재, 김환, 신이피, 홍세진 등 장애 및 비장애예술가 7명이 함께한 지난 5개월간의 기록은 심신의 장애보다 무서운 부정적 편견에 따른 사회적 장애를 공동작품을 통해 스스로 해체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6일 개막한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를 주제로 한 전시는 인간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란 배려와 존중임을 다시 한번 공론화하는 무대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개념을 시각예술로 재확인시킨 공동창작 워크숍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다양성 존중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내적으론 ‘동등한 예술생산자’라는 공통의 가치관을 재조성하고, 외적으론 대중들이 나와 다른 삶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융합의 길을 제시했다. 참여 작가 중 한명인 최챈주의 말처럼 장애인을 낯선 사람 혹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마주하는 사람, 같이하는 사람으로 대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물론 그때가 오면 장애인 교육시설로 인해 집값이 떨어진다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Posted by K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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