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지연의 미술 소환

잘 지내 “사랑은 재앙입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타오르거나, 미묘한 감정의 엇박자 속에 식어 버리거나, 혹은 습관인 양 유지하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소피 칼의 진심을 알 길은 없다. 출장길에서 남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의 e메일을 받았을 때, 소피 칼은 행간에 녹아 있는 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며, 이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문장으로 끝맺는 ‘이별 편지’가, 완전한 이별의 선언인지, 계속 만나고는 싶다는 뜻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여주면서 해석을 부탁했다. 그 이후 작가는 좀 더 많은 여성,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더보기
전시인가, 과시인가 “처음 루브르박물관에 들어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에스컬레이터를 가득 메우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파도. 스펙터클은 루브르가 아니라 그 군중이 이미 만들어내고 있었다. (…) 미술관의 관람객은 볼거리에 집착한다. 소비한다. 거대 미술관은 약탈한 수집품으로 가득 찼고, 그 소장품을 다시 약탈하는 군중이 가득하다.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 약탈하는지, 너무나 사랑해서 탐하는 건지. 스냅샷을 날린다.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군상을 주목한다.” 김홍식의 관심사는 현대 도시가 겪고 있는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도시 산책자가 되어 이곳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지켜보고, 그 현상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관찰하면서 의미를 추적한다. 그 산책의 발길이 ‘미술관’에 닿.. 더보기
터널 뒤늦게 찾아봤던 드라마 에서 터널은 ‘운명과 시간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던 형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널을 통해 미래로 가고, 그곳에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내용. 진실에 닿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여행인 걸까. 시간은 종종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익숙한 주변 풍경에 낯선 기운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피터 도이그가 화면에 담은 터널은 무지개색이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기묘한 화면의 톤 덕분에 사람들은 피터 도이그의 그림을 통해 몽환적인 상황을 만나곤 한다. 토론토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 터널에 무지개가 뜬 건 1972년의 일이다. 노르웨이 출신 베르그 욘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애도하는.. 더보기
삼대의 모국어 엄마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엄마의 모국어는 아랍어다. 이후 엄마는 프랑스로 이주해 딸 지네브 세디라를 낳았다. 프랑스어를 쓰며 성장한 그는 이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딸은 영어로 말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삼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네브 세디라는 자신의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정체성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3채널 영상 작품 ‘모국어’를 완성했다. 작가와, 그의 엄마, 딸, 세 여성은 서로서로 대화를 나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서 화면을 마주한 관객들은, 영상을 통해 각자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영상의 소리는 헤드폰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소리가 없기 때문.. 더보기
나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계획 없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새벽 2시다. 잠이 오지는 않지만 어깨에 멘 배낭이 너무 무겁다. 이 도시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고, 구름 속에 나를 가둔다. 비는 쏟아지고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고 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람마다 다른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살 테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 안에 ‘세계일주’나 ‘여행’을 담고 있지 않을까. 전세금을 빼서 몇 년간 세계 곳곳을 다녔다는 가족의 이야기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산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과감히 벗어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매력적이지만, 큰.. 더보기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 살면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맺어온 관계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비단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공물, 자연환경 등 세상 안팎에 있는 많은 것들과 생각보다 촘촘하게 얽혀 있다. 관계 밖에서의 생존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일은 ‘순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순리에 순응하며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소통 능력이다. 1964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필립 파레노는 전시장 안에 소통을 유도하는 장치들을 풀어 놓는다. 특정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작업을 펼치는 그는 조명, 음향, 퍼포먼스, 영상,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공간과 시간을 공감각적으로 구성한다. 철학자, 저술가, 아티스트 등 .. 더보기
평범함의 격조 사석원은 치바이스를 동양화의 ‘넘사벽’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동양화를 막 시작했을 때 그의 화집을 본 사석원은, 따뜻한 시선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생동감을 포착한 표현력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치바이스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그 역시 살아있는 것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시, 서, 화, 각 모두를 아우른 치바이스는 일상의 소소한 대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주목했다. 당대 문인화가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던 ‘미물’이었다. 고전과 자연을 스승 삼아 그림을 그렸던 작가에게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 있었으니 다른 잣대를 내세우며 소재를 고를 일이 아니었다. 세상을 대하는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선인의 틀에서 벗어난 화면을 구상하기 위해 그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먹색을.. 더보기
파벨라 유토피아는 잊어라. 미래 도시는 방대한 슬럼이다.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가 도시에 거주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봤다. 많은 것이 도시로 집중되는 가운데, 도시 인구의 절반은 슬럼 거주자일 것이라는 예측이 덧붙었다. 전반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면 슬럼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던 과거의 예언은 부의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를 봤을 때, 안일한 믿음에 불과하다. 디오니시오 곤살레스는 10여년 전부터 대도시의 슬럼 지구를 살피며 도시 빈민들의 터전을 촬영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곳곳에 퍼져 있는 빈민촌 파벨라의 건축 구조는 시선을 끌었다.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는 불규칙적이고 불안한 오두막이 산자락부터 산등성이를 타고 퍼져나가 있다. 거주지이긴 하지만, 범죄와 마약의 온상이기도 한 .. 더보기
일식 얼마 전 미국에서는 1918년 이후 99년 만에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개기일식이 있었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장관이라고 하여, 원정단을 꾸려 미국으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순간, 사람들은 태양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단다. 지구의 생태계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양을 연구하는 것은 천문학계의 오랜 과제이지만, 태양은 그 빛이 너무 강해 제대로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계는 태양이 가려지는 이 순간, 태양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과 개혁의 시기에 살았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오페라 의 무대장식과 의상을 맡아 흰색 배경에 검은 사각형 콘셉.. 더보기
낮잠 분주하다. 세상의 속도는 빠르고, 그 속도를 부정할 용기가 없다면 따르는 게 당연한 세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낙오자가 되는 건 순식간일 테니, 초조한 마음이 조급증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바빠지고, 더 바빠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쉼 없이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휴식을 꿈꾸고, 일탈을 소원하는 건, 그런 바람 자체가 일상의 바퀴를 계속 돌릴 수 있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한때는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일이 당연하던 시절도 있었단다.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는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즐긴다. 낮잠 권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준과 심장질환 발병률이 낮다는 연구결과나, 매일 자는 낮잠이 마음을 깨끗하게 창의적으로 만들어준다고 한 아인슈타.. 더보기
지속가능성이라는 과제 어쩌면 과제는 ‘시작’이 아니라 시작한 일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제에는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어떻게, 왜 지속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르긴 하겠지만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지역공동체의 일상에 개입하는 프로젝트인 경우 지속가능성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그랜비 포 스트리츠’로 영국의 권위 넘치는 미술상인 터너상의 수상자가 되면서 주목받았던 건축가 디자이너 그룹 어셈블의 작업은 지역사회의 공간과 공동체를 생산적으로 연결하는 바람직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2011년 마을 주민들의 의뢰로 그랜비 프로젝트에 착수한 어셈블이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은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였다. 마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프로젝트 이후에도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바로 그 지역공동체라.. 더보기
무릎 꿇은 남자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한 가지를 흔들리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오랫동안 원해왔다’고 기술한 문영민은 무릎 꿇고 엎드린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왔다. 작가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화면에 담으며 일상에서 되풀이되는 한 부분을 회화라는 반복 행위로 옮기는 실천을 수행 중이다. 반복은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자 경험을 축적하는 일, 성찰의 도구, 혹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공간 안에서 한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다. 남자는 절을 하는 중이다. 한국사회에서 절은 익숙한 동작이다. 제사상 앞에서, 장례식장에서 죽은 자를 애도하며, 남겨진 자를 위로하며 사람들은 몸을 숙인다. 크고 작은 폭력이 일상적으로 .. 더보기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 미지의 대상을 향한 동경과 호기심은 여행의 동기가 되곤 한다. 여행을 떠나는 또 다른 이유는 도시 속 일상에 정주하는 삶이 지겹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에르 위그가 남극 여행을 결심한 데는 쥘 베른의 소설 영향이 컸다. 를 비롯한 과학소설은 생명체와 그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현실과 가상을 기묘하게 섞어 작업하는 위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구온난화로 남극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섬들이 드러났고, 섬에는 흰 동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작가와 동료들은 알비노 펭귄으로 추정되는 생명체를 찾아 좌표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섬을 향했다. 2005년 2월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한 그들은 미지의 존재와 교신하기 위한 도구도 챙겼다. 그의 동료가 ‘인생을 바꿀 만한 체.. 더보기
너무 걱정 마 얼마 전 암투병 끝에 75세로 별세한 정강자 작가의 생전 인터뷰에서 “작품을 하는 동안 필요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살아왔다”는 문구를 보았다. 유년기 이후 50년 넘는 세월을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늘 ‘죽음’을 각오했다는 고인은 발병 이후에도 하루 12시간 작업에 매진했다고 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정강자의 등장은 센세이셔널했다. 1968년, 당시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무교동 세시봉에서 열린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 무대에 작가는 블루머와 흰 머플러만 걸친 채 등장했다. 사람들은 투명풍선을 불어 작가의 몸에 붙였고, 작가가 일어서면 관객이 달려들어 풍선을 터뜨렸다. 한국 최초 페미니스트 문맥의 퍼포먼스로 평가받는 이 작업은, 가부장적 사고에 둘러싸인 경직된 사회에 문화적 해방구를 여는 신호탄 같은.. 더보기
예술이라는 보철기구 “이방인의 기분을 느껴보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1943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규범 사이 긴장감, 그 긴장이 창작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했다.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고민하며 작업하던 그는 1977년 캐나다로 이주한 후 이방인으로 살면서 사회 안에서 상처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외국인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분위기, 이방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는 현실을 본 작가는 이방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구를 만들어 ‘문화적 보철기구’라고 명명했다. ‘외국인 지팡이’는 이방인이 사용하는 일종의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의사소통.. 더보기
시계를 의식하는 일 “우주는 신성한 존재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시계와 비슷하다.” 르네상스 시대 천문학자이자 점성학자였던 케플러는 우주의 질서에서 시계의 시스템을 보았다. 이 시기, 시계태엽 장치와도 같은 우주에서 신은 뛰어난 시계공이 아니겠느냐는 발언도 등장했다. 해시계, 물시계처럼 기존에 시간을 알려주던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계 시계의 등장은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과학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기계 시계가 내는 소음은 사람들이 시간을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계산하고 계량화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풀어온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합리.. 더보기
그 모든 가능성의 불안함 늘 당연하게 흘러갈 것이라 믿고 몸을 맡기는 일상은, 문득 당연한 듯 믿음을 배반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생이 의미를 갖는다는 말은 기대를 빗나가는 삶을 납득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배신의 가능성을 품은 일상은 다른 이야기를 숨긴 채 표표히 지나간다. 2002년 스티브 매퀸은 카리브해 그레나다에서 비디오 작품 ‘카리브 리프’를 촬영했다. 1651년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우던 카리브인들이 ‘카리브 리프’라고 불리는 소튜 마을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역사와 이곳의 현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그 지역을 찾은 매퀸은 당시 촬영을 위해 섭외했던 청년 애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작업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필름에 담은 지 두 달 뒤, 애시가 마약 문제에 .. 더보기
걷기 걷기는 세계를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건만, 인간이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걷기는 일상에서 멀어졌고,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했다. 그곳에 닿고 싶다면, 자동차의 속도에서 내려와 걷기가 만들어주는 리듬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다. 인간 신체에 최적화된 속도로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걷기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주는 철학이기도 했다. 재닛 카디프는 캐나다 앨버타의 밴프 센터에 머물던 1991년, 처음 걷기 작업을 시작했다. 출발은 느슨했다. 관객은 12분간 흘러나오는 작가의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인 채 숲을 거닐면 된다. 걷기 시리즈는 회를 거듭하면서 공간 탐색의 방법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2013년 카셀도큐멘타와 2014년 시드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업은 아이팟을 이용하여.. 더보기
기억의 잡초 ‘기억의 궁전’은 장소에 기억을 심는 기술이었다. 사람들이 장소에 관한 특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 기억술은 책이 없던 시절, 구두로 정보를 전달해야 했던 사람들이 애용했다. 방법은 이렇다. 내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장소와 동선을 생각한 후 동선에 따라 기억해야 할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배치한다. 기억을 꺼내고 싶다면 이 궁전에 발을 들인 뒤 동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궁전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기억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기억하기 위해 본인이 만든 공간 안으로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 이 기억술의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기억을 오래 묶어 두기에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 기술을 익힌단다.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사용.. 더보기
오래된 잠수 세상에 나오면, 그 다음에는 늙어가는 일만 남는다. 어린 것과 젊은 것과 늙은 것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세상 모든 것들은 태어난 뒤 줄곧 처음을 경험한다. 이 땅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간다. 여기 머물고 있는 존재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유사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면서 늙고 병들고 사라진다. 두꺼비에게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듯, 늙은 것은 새것에게 자리를 내주고 흐릿해진다. 박주애는 과거를 품고 있는 현재의 공간을 서성이면서 ‘폐지를 줍듯’ 늙어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찰하는 중이다. 살펴보니, 사람이든 집이든 돌이든 바람이든 사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다. 관계는 관계로 이어져 있고, 이것은 저것으로 대치되며, 새것은 그을려졌다. 사라지는 것은 어쩐지 애틋했다. 그것이 나를 둘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