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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사는 나라 지방이라는 말 앞에서는 괜히 목울대가 촉촉해진다. 이 표현 자체가 서울을 기준으로 한 분류일 터이므로 어쩔 수 없이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비운의 느낌을 풍기는 탓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 대도시보다는 낙후된 이곳은 주5일제 이후로 화려한 아웃도어 복장으로 치장한 도회지 사람들이 다녀가는 펜션이나 캠핑장의 주 무대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그 지방이 한때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힘을 쏟은 것이 캐릭터 사업이다. 금산에서는 인삼이, 안흥에서는 찐빵이, 단양에서는 온달과 평강 등이 지역을 대표하는 식이다. 자신들만의 특산물이나 전통을 전국에 널리 알려 더 이상 서울의 변방이 아님을 선언하기 위함이니 이 캐릭터가 가지는 역할은 꽤 묵직하다. 그렇다고 이 무게감이 물리적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 텐.. 더보기
웃음 축구 골대에 휘장처럼 커다란 천을 두른다. 2.5m 정도의 골대 높이를 넘길 수 있는 천은 그 자체로도 꽤 무겁고 크다. 한쪽 골대에는 검은색, 맞은편에는 흰색 천이 둘러진다. 천에는 구멍들이 여러 개 나있다. 이제 당신은 이 무대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원하는 색깔의 천으로 가서 원하는 구멍에 손과 얼굴을 내밀면 된다. 그리고 웃는다. 다만 진심으로 웃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요구다. 도대체 나는 언제 어떤 이유로 웃었던가. 해는 중천에 떠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소설 의 뫼르소에게 쏟아지는 태양처럼. 원치 않아도 선택한 무대에 서면 눈부신 태양과 마주하게 되어 있다. 그 태양 아래에서 내 웃음의 기억 혹은 웃음이라는 행위 자체와 마주한다. 태양.. 더보기
내가 제일 잘나가! 루소의 새 발견 앙리 루소는 미술사상 가장 특이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세관원 출신의 그는 세관원이라는 뜻의 ‘두아니에(Le Douani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그의 업무는 거창한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센강을 타고 올라온 상선들에 통행료를 징수하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이처럼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루소는 40세경 작업실을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49세가 되어서야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22년간 몸담았던 세관을 떠나게 된다. 이렇듯 정식으로 미술대학을 나온 적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던 일요화가회 출신의 루소는 자신을 아주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후배였던 피카소와 자신만이 당대 최고의 화가라고 말했을 만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루소의.. 더보기
밀양 부끄럽게도 그곳에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다녀온 이들의 말과 사진을 통해 풍문처럼 듣고 보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가장 생경했던 건 풍문의 주인공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자식 다 키워 타지로 떠나보내고, 밭에서 나고 자란 것들만으로도 살림이 충분한 어르신들이 아쉬울 게 뭐가 있을까. 그저 사는 날까지 자식들 병수발이나 시키지 않게 건강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말고는. 그렇게 더 바랄 게 없는 분들이 겨울철 아랫목을 마다하고, 봄날 파종도 미루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뭔가를 반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몸이 쑤시는 날조차도 습관처럼 그냥 아까워서 100W짜리 전기장판도 두어 번은 망설이다 켰을 이분들한테 765㎸짜리 송전탑을 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까무러칠 일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더보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키냐르 “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그 놀란 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한 베일들 같았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의 부분이다. 자전적이면서 문헌학적인, 소설 같지 않은 이 소설을 만났던 경험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난 여름 나는 L과 함께 키냐르의 길을 따라갔다. 바로 이탈리아의 아레초로 향했던 .. 더보기
두아노의 아이들 조례시간이라는데 선생님은 아직 본격적인 ‘잔소리’를 시작하지 않은 걸까.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는 이 교실은 그야말로 개성이 넘친다. 저기 맨 끝줄 명당자리를 차지한 놈은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그 앞줄로는 빠져서는 안되는 교실 풍경을 완성하듯 뒤를 향해 아예 몸을 젖힌 녀석도 있다. 물론 압권은 사진 속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소년이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눈은 천장을 뚫을 기세다. 사진 찍는 이방인을 의식하고 있는 건, 그 대각선 뒤편으로 앉은 아이가 유일하다. 이 아이는 나중에라도 카메라를 든 아저씨가 로베르 두아노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는 외젠 아제, 카르티에 브레송, 윌리 호니스 등 파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기억하게 만든 사진가들의 계보에.. 더보기
월계관에 숨겨진 비밀 아폴론이 월계수로 만든 관을 쓴 이유는 순전히 한 여자 덕분(?)이다. 첫사랑의 여자 다프네! 사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미남 아폴론은 사랑의 아픔이 많은 남신이다. 게다가 첫사랑의 실패는 순전히 올림포스 신궁의 꼬마 악동인 에로스 때문이었다. 신도 사랑에는 속수무책인 거다. 아폴론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만나 그의 활솜씨를 조롱했다. 장난감 같은 화살로 무얼 하겠느냐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황금 화살을 쏘아 아름다운 요정 다프네를 사랑하게 만들고,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납화살을 쏘았다. 화살에 맞는 순간, 아폴론은 하필이면 남자에겐 도통 관심이 없는 선머슴 같은 다프네에게 반하여 끈질기게 구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다프네는 아폴론을 미워하고 피해 다녀야 할 운명이 .. 더보기
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곳과 이 장면이 왠지 익숙하다. 사진 속 그는 길을 잃어버린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누구인 것 같기도 하다. 정확하게 어딘지,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몽환적인 풍경은 답답하고 불안하면서도 음울하다. 들여다볼수록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궁금해서 자꾸만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이 묘한 끌림은 마치 꿈속 같다. 수잔 번스타인(Susan Burnstine)은 사진으로 꿈의 세계를 묘사하는 사진가다.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카메라도 손수 제작한다. 잡동사니 플라스틱 상자에 중고 카메라 부속품을 고무로 연결한 이 수동 카메라는 너무 단순해,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무려 스물한 대의 카메라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렌즈의 초점은 잘 맞지 않.. 더보기
200년 전의 세월호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6년 7월2일, 프랑스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자격도 갖추지 않은 채 왕실의 연줄로 선장이 된 사람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두사호는 당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향하던 길이었다. 자국의 군인들과 이주민 등 400여명을 태운 이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49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했다.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5명뿐이었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는 사회적 화제가 된 이 사건을 그림으로 구상한다. 실제로 그는 난파선의 뗏목 모형을 .. 더보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내가 나이 든 나를 안고 있다. 과거의 내가 어느 날 지금의 나를 찾아와 성모마리아가 그 아들을 품듯이 지그시 안아준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나의 모든 지난 행적과 망설임을 알고 있는 나의 과거에는 굳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이 그냥 흐느끼기만 해도 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이들에 대한 집착은 이렇게 온전히 나를 이해할 또 다른 분신에 대한 갈증 때문에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다르듯이, 그 누구도 내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결핍과 외로움과 집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젊은 작가 조니 브리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뜬 탈을 쓴 채 아버지를 안고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젊었을 때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그 자신이기도 하며, 스스로 아버지가 된 미래의 모습이기.. 더보기
죽은 동물에 대한 예의 데미언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 이전에 죽은 짐승을 그린 그림이 있었을까? 본격적으로 죽은 사냥물 그림이 그려진 곳은 1650년대 이후 남부 네덜란드였다. 죽은 사냥감을 그린 그림의 특징은 바로 그 압도적인 크기와 실제처럼 보이는 트롱프뢰이유(눈속임그림)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그림은 작은 주택에는 걸맞지 않고, 성이나 저택의 중앙홀에 걸려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나마 진짜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사냥은 왕과 귀족, 기사의 품위에 걸맞은 취미활동으로 근본적으로 특권계층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원래 사냥감 정물화도 사냥처럼 왕족과 귀족을 위한 그림이었지만, 상류 부르주아들이 앞다투어 구매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대개 사냥에 대한 취향을 가지기에는 교양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부르주아들.. 더보기
사물의 죽음 기계의 속살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 몸처럼 기계 속에도 전원이 타고 흐르는 혈관이 있고 오작동을 막아주는 뇌가 있고, 미세한 움직임을 위한 손발이 있겠으나 그 원리를 하나하나 따져 보는 이는 드물다. 스마트폰이 점점 똑똑해지기 위해 그 몸속에 어떤 장기를 달아야 하는지는 사실 관심 밖이다. 빠르고 쉽고 섹시하게 진화하면 그뿐. 기계는 이렇게 쓸모에 따라 유행처럼 찾아왔다가 진화된 경쟁자에게 밀려 고물로 취급 받기 일쑤다. 올해 갤러리 나우의 작가상을 받은 사진가 막스 데 에스테반은 이 기계의 운명에 주목한다. ‘명제1: 수명이 다한 사물들’이라는 제목처럼 기계는 그가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여러 명제 중 단연 첫 번째에 해당한다. 그에게 기계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시대에 소외된 생명체다. 그것.. 더보기
삶에 번번이 얻어맞은 얼굴 오랫동안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대가의 유명 작품보다 훨씬 더 마음을 끄는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공부가 주는 축복이다. 통상 로댕의 경우 ‘지옥의 문’ ‘영원한 우상’ ‘키스’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들보다 점점 더 마음을 사로잡는 뭉클한 작품이 있다. 바로 ‘코깨진 사내’다. 젊은 시절 로댕이 생활고로 버젓한 모델을 구할 수 없을 때, 이웃집에 사는 ‘비비’라는 별명을 가진 가난한 노인이 모델을 서주었다. 그러나 난방 시설이 없는 아틀리에는 너무 추워서 노인의 머리를 빚은 점토가 얼어 갈라졌으며, 두개골은 깨졌다. 간신히 얼굴만(뒤통수가 없다)을 겨우 지탱할 수 있었고, 코가 깨진 이런 얼굴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1864년 로댕은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지.. 더보기
진달래 봄날이 가고 있다. 스러진 진달래 꽃잎처럼. 연하디 연한, 흔하디 흔한 이 꽃은 우리 정서의 밑바닥에서 꽃을 피운 지 오래다. 한때는 철이와 순이부터 빨치산까지 모두가 지천에 널린 이 꽃잎을 따먹었으며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경기장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부르며 뜨거운 마음을 터뜨렸다. 함경도가 고향인 시인 김규동은 그의 시에서 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기에는 차마 사치스러워 심장으로 들어가게 했다고까지 고백한다. 시 제목이 ‘육체로 들어간 꽃잎’인 까닭이다.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김규동의 이 시가 사진가 고정남의 ‘진달래’ 작업에도 영감을 던졌다. 그의 고향 전남 장흥에도 늘 진달래는 흐드러졌다. 무심하게 그리고 수수하게. 전혀 화려하지 않아서, 호기심과 의아함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가고 .. 더보기
세잔의 아빠생각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분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대개 연인을 숨긴다든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한다든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자가 있음을 알린다든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인신고를 한다든지 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 즉 아버지의 말이 법이었던 시절에 아버지를 거역하고 제멋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술가들은 섬세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데다 그들이 선택한 여자들은 대개 모델이나 재봉사, 점원 같은 신분이 낮은 여자들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를테면 마네는 집안의 피아노 가정교사와, 밀레는 농사꾼의 딸과, 모네와 르누아르는 모델과 사귀고 동거한 사람들이다. 세잔은 직공 출신의 모델과 아이를 낳았지만, 오랫동안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숨겼다. 그들이 동거한.. 더보기
달빛 아래에서 처음에는 달을 찍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막 소말리아에서 옆의 나라 지부티로 국경을 넘어온 이들은 지금 달빛보다 귀한 단말기 신호를 찾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동과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는 지부티는 인근에서 유럽이나 중동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간 거점이다. 말이 이민이지, 바다의 폭이 최대한 좁은 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은 허락받지 않은 탈출을 감행한다는 뜻이다.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나선 불법이민자들에게는 단말기의 전파 또한 허공을 몇 번 헤맨 끝에서야 잡힐 만큼 가늘게 포착될 뿐이다. 고국 소말리아 국경 지대에서 보내오는 전파를 잡아야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마 가족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는 위태로운 .. 더보기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맹세 기원전 7세기경 로마에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형제들! 그들에게 조국에 봉사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패권을 다투던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는 전면전을 하는 대신, 세 사람씩 용사를 뽑아 결투를 하게 하고, 그 결과로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그림은 로마대표로 선발된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가 조국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감동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칼을 건네주고 있고, 삼형제는 그 칼을 향해 무쇠처럼 강인한 팔을 뻗치고 있다. 투지에 불타는 눈과 꽉 다문 입술, 힘줄이 불거진 팔다리는 그들의 각오가 얼마나 투철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른편에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여인들이 비탄에 빠져 있다. 호라티우스가의 딸이 큐라티우가.. 더보기
슈퍼맨의 꿈 소화기 통을 메고 하늘로 오르려는 이 남자 예사롭지 않다. 의자를 발사대 삼아 소화기 분말을 열심히 뿜어보지만 얼굴만이 하늘을 향할 뿐 비상할 기미라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복장은 꼭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실험맨 같다. 우스꽝스러운 실험을 진지하게 펼치면서 결국 보는 이로 하여금 피식 웃게 만드는 상황도 방송과 비슷하지만, 배경 선정이며 구도에 정말 많은 공을 들인 나머지 진짜 웃어도 되는 건가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보자기를 두른 채 책상 위에서 뛰어내려봤자 슈퍼맨이 되기는커녕 엄마의 잔소리 위를 날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우리의 모험시대는 끝이 난다. 그렇게 철이 들었던 작가 류현민은 어느 날 소주잔을 얼굴에 붙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 일탈의 쾌감을 느꼈다. 결국 떨.. 더보기
‘씨 뿌리는 사람’이 그립다! 반 고흐가 아버지보다 사랑했던 화가 밀레. 밀레는 노동의 가치를 평생 그림 속에서 실현했던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머물렀던 파리에서 어린 아내를 폐병으로 잃고, 빈농 출신의 새 아내와 함께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난한 농부처럼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척박하지만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목가적인 서정성이 우러나오는 ‘만종’과 ‘이삭줍기’ 못지않은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가 바르비종에서 처음 그린 유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어둠이 오기 전인 해질 녘, 가파르게 경사진 산비탈을 배경으로, 건장해 보이지만 아주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농사꾼이 씨를 뿌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둡게 가려진 눈, 마른 듯 굳건한 턱과 벌어진 .. 더보기
죄인 작가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작업이 안된다며 친구 만나 푸념도 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전시장을 기웃거리며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자유로운가.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러나 내 자식이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수입은 불규칙적이고 몸은 고되며 작업을 알리기 위해 부산을 떨어야 하는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직업일 뿐이다. 어떤 연유로 작가의 길로 들어섰건 둘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닐 터, 그 괴리 사이에서 작가의 괴로움이 싹튼다. 다음주부터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개하는 권지현의 ‘죄인’ 연작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부모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신처럼, 사람들이 늘 짊어지고 다니는 죄책감은 무엇일까. 작업의 진정성을 위해 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