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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꽃, 튤립포매니아 꽃 중의 꽃은 어떤 꽃일까?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 단연 장미꽃일 것이다. 그러나 장미 이전의 꽃의 제왕은 튤립이었다. 서양의 옛 그림에서 장미보다는 튤립이 대단히 정묘하게 역동적으로 그려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튤립은 보통 네덜란드를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은 수입한 것이다. 원래 천산산맥(파미르고원) 구릉지대가 원산지인 튤립은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에 들어왔고, 네덜란드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튤립은 꽃이 크고 튼튼하게 잘 자라서인지 곧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네덜란드의 할렘과 레이덴이 제2의 고향이 됐다. 황금기 네덜란드에서 비싼 가격으로 매매됐던 튤립은 단색이 아니라 흰색 바탕에 붉은색 무늬 등 두 가지 이상의 색이 섞여 있는 품종이었다. 이 화려한 튤립은 ‘모자이크 바이러스’.. 더보기
불편한 유령 대개 사진에서는 초점이 맞은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은 보통은 사진 한가운데에 놓인다. 그렇게 주목받고 있는 대상에 주목하도록 우리의 눈은 길들여져 왔다. 그 ‘쨍한’ 사진에서 우리는 강박처럼 그가 왜 주인공인지를 읽어내려고 애쓴다. 대상의 표정, 피부색, 복장, 나이 등등 우리가 사진 속에서 찾아 헤매는 기호들이 정말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한번쯤 사진 속의 내 모습과 전혀 동화되지 못하는 경험을 해봤다면, 그것은 단지 사진이 실물보다 못 나와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모습이 나를 전혀 설명해 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질 사진가 칼레는 이 고민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인물들은 모두 초점이 빗나가 있다. 유령처럼 흐릿한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생략.. 더보기
수잔 발라동의 올랭피아 근대 여성화가 중에는 모델 출신이 여럿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비천한 신분 출신의 모델들은 천재화가들 옆에서 진정한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 모델 빅토린 뫼렝,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던 모델은 수잔 발라동이었다. 발라동은 당대 밑바닥 직업이었던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청소부, 직공, 양재사 등 갖가지 궂은일을 경험했다. 비교적(?) 안정된 서커스단의 무희가 되었지만 추락으로 부상을 입어 서커스단에서 쫓겨난다. 그때 16세의 발라동은 늙은 퓌비 드 사반의 모델이 되었고, 이후 르누아르의 모델이 된다. 마침내 로트렉의 모델이 되었을 때, .. 더보기
판잣집에서의 하룻밤 판잣집이 한 채 있다. 오래된 기념사진처럼 빛도 바래 보인다. 새하얀 구름과 적당히 짙은 나무 그림자는 가난을 축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런 의심없이 본다면 영락없이 과거의, 추억할 법한 누군가의 앨범 사진이다. 그러나 저 멀리 비행기가 자꾸만 눈에 걸린다. 아무리 날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행기가 가난한 동네의 장식품처럼 서 있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쓰레기 한 점 없고, 양철벽에는 옹색한 방에서 쫓겨나온 살림살이 하나도 걸려있지를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난해 문을 연 이곳은 호텔이다. 호텔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수백만명이 판자촌에 살고 있는 진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체험해 보라는 유혹이 가득하다. 대신 뜨거운 물과 인터넷, 온돌이 제공되는 특별한 공간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 더보기
부활절, 다시 산다는 것 부활절 무렵에 방문한 피렌체에서 발견한 숨은 보석은 산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였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인 프라 안젤리코(Fra는 ‘형제’, Angelico는 ‘천사’란 뜻)의 작품이다. 1436년에서 1445년까지 이곳에 살았던 그는 42개의 독방, 회랑, 회의실, 1층 복도에 자신의 작품 일부를 남겼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만큼 드라마틱한 감동을 안겨주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친근한 것이 보면 볼수록 매혹적이다. 안젤리코가 속해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와 청빈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사용하라는 신의 강령에 따라 일종의 기도의 행위로서 그림을 그렸다. 예수의 부활을 그린 이 그림은 수도사의 소박하고 자그마한 방 벽에 .. 더보기
뿌리 혹은 먼지 이것은 실뿌리다. 땅속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가능한 한 기다랗게 자라던 중이었다. 찰지지 않고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땅은 살아남기 위해 실뿌리로 하여금 악착같이 잔가지를 치도록 부추겼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뿌리째 뽑혀 나와 끝을 맞이한다. 이제 땅 위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시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나마 서서히 썩어들어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아니다, 이것은 먼지다. 마른 땅에서 피어난 흙이며 살갗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이며 온갖 쓸모없는 것들이 뒤엉켜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세포처럼 자그맣더니 점점 자라나 주변의 모든 잉여물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창틀에서 악착같이 한데 뭉쳐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것.. 더보기
르누아르, 여체 탐닉은 무죄? 얼마 전 (2012)라는 영화를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남프랑스 코다쥐르에서의 르누아르의 말년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다. 이야기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부탁으로 모델 일을 하러온 ‘데데’라는 배우 지망생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말년의 르누아르에게 예술혼을 다시 불태우게 만든 마지막 모델이자 매혹적인 뮤즈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훗날 거장의 아들 중 드물게 성공한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르누아르는 전쟁 중에도 꽃과 여체를 주로 그렸다. 아들 장은 아버지에게 도덕이 무너지고 인간성이 황폐해가는 이런 시기에 속물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한다. 르누아르는 전쟁에서 두 아들의 팔과 다리를 잃은 것으로 자기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더보기
그래비티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텅 빈 복도에 사과가 부유하고 있다. 아니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낙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기다란 복도는 사과가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도 앞에서 복도 끝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마저 준다. 아담을 유혹하고, 신데렐라를 잠들게 했으며, 뉴턴에게 추락하는 것은 무게가 있다는 것을 일러준 빨간 사과가 그렇게 허공에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강하고 있는 사과는 분명 낯설다. 사진가 안준의 ‘그래비티’ 연작은 우리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시각적 실험이다. 실험이므로 조작된 사진이 아니다. 작가는 만족할 만한 이미지를 얻을 때까지 카메라 앞에서 사과 던지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그.. 더보기
괜찮아! 나를 위한 초긍정 존 레넌과 그의 뮤즈였던 개념미술가 오노 요코가 한창 사랑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요코는 존의 광팬으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게 된다. 소포 속에는 바늘뭉치로 만들어진 인형이 들어 있었다. 마치 자기 남자를 빼앗아 가버린 여자한테 음해와 복수의 심정으로 보낸 이 물건은 일종의 폭탄 테러 비슷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괜찮아!(Forget it)’를 처음 본 순간 떠오른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는 마치 미래의 사건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작품은 ‘개념미술’이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아이디어와 생각 자체가 예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개념미술은 제목(혹은 지시문)이 매우 중요한데, 이 작품에서도 제목과 바늘이.. 더보기
[지금 논쟁 중]미술인 대상 서바이벌 오디션 ‘미술인 서바이벌 오디션’이라 불리는 케이블채널 스토리온의 프로그램 가 이달 말 방영을 앞두고 있다. 미술인을 대상으로 한 첫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미술계의 의견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 영향을 강조하는 미술인들은 가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미술의 대중화를 이룰 것이라고 본다. 또 선정된 작가에 대한 갖가지 파격적인 지원이 있는 만큼 새로운 미술가의 발굴과 양성에도 이바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정적 파장을 우려하는 미술인들은 상업성으로 인해 미술, 미술인이 지닌 문화적·예술적 가치를 크게 훼손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미술에 대한 대중화는 이룰지 몰라도 현대미술에 대한 갖가지 오해를 더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하향평준화 등 부작용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 작가들 소통 통.. 더보기
아홉 살 인생 체르니 30번 이상 연주 가능, 영어 회화 및 독해 중급 이상의 실력은 기본이다. 여기에 플루트나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고 발레나 탱고, 수영도 수준급이다. 88만원 세대의 스펙이 아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의 화려한 성적표다.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며, 여행을 즐길 줄 알아야 중산층으로 통한다는 유럽식 기준으로 보자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꾸려갈 삶은 훨씬 풍요로워 보인다. 다만 이런 능력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통해 압축적으로 길러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주춤거리게 될 뿐이다. 사진가 성희진이 류가헌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비지키드’ 속에는 정말 바쁜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스키장이나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승마장이나 요트장, 아이스하키 링크에서 노련하고 당.. 더보기
이런 복수 어때요?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지조있는 유대인 과부 유디트가 아시리아 군대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했다는 구약 외경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논개’인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술에 취하게 한 뒤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17세기의 한 여성화가가 그린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이 겪었던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그녀는 19세 때 그림을 가르쳐주었던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 해경(海景)에 능통한 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라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은 아버지의 고소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녀는 쫓기듯 피렌체의 한 화가와 결혼하게 된다. 이 그림은 피렌체 시절 그린 유디트 연작 중 하나이다.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강간한 남자를 그려.. 더보기
당신의 필요와 요구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고딕 양식의 집들은 생뚱맞다. 개성 없이 복제된 일련의 집들은 한껏 멋을 주려다가 실패한 공간처럼 보인다. 시골에 있어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의 속물스러움은 ‘나는 절대 저런 끔찍한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저런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고 꿈꾼다. 이쯤 되면 우리의 욕망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낳는 것인지, 아니면 공간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인지도 혼돈스럽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당신의 필요와 요구’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여는 신은경은 이런 식으로 공간의 안과 밖을 다룬다. 처음에는 앤티크 의자와 조야한 벽화가 뒤죽박죽된 결혼식장이나 스튜디오의 키치적인 모습에 주목하더니 이제는 아예 공간 밖으로 .. 더보기
쇠라의 비밀스러운 소풍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미술관이 자랑하는 대표작으로 신인상파의 점묘법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를 더욱 심화시켜 점으로만 그린 그림을 점묘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화파를 신인상파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신진비평가 펠렉스 페네옹이 1886년 인상주의 마지막 전람회에서 쇠라의 이 작품을 보고 붙인 것이다. 쇠라의 그림은 당시 19세기를 주도한 과학적인 색채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사물이 다양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의 점묘법은 보색대비로 점을 찍으면 인간의 눈이 그것을 혼합하여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채로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쇠라는 이 작품을 통해 점묘법이 갖는 불안정함과 순간성이라는 한계를 보상하.. 더보기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권순관, An Interview, 2009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사진가 권순관이 경희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면서 붙인 제목이다. 꽤 복잡한 말이다.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모순과 대립을 통해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간다는 뜻일 텐데 이게 미완성이니 몹시 회의적이다. 게다가 이 말이 극장을 수식한다. 변증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극장이라는 게 존재할까. 작가에게 그것은 현실 세계의 또 다른 은유다. 그에게 현실은 극장처럼 환상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모든 가치 체계, 불변의 진리를 지닌 사건 등은 그에게 변증법적으로 변해갈 순간적인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하물며 사진 한 장이 역사적 사건을 압축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연출이 되었든, 인물 .. 더보기
남자들의 화가 구스타프 카유보트, 대패질하는 사람들, 1875년, 오르세미술관 인상파 화가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화가 중 하나가 구스타프 카유보트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화가가 아니라 미술품 콜렉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법학을 전공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카유보트는 당시로선 드물게 인상파 회화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인상파 화가들의 경제적 후원자인 동시에 그들 그림의 최초 수집가가 되었다. 카유보트는 인상파 화가들의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르누아르의 작품을 구입했고, 이후 피사로, 모네 등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뿐만 아니라 모네에게 작업실을 저렴하게 빌려주기도 했다. 그때 모네의 격려로 취미로 그렸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었던 것! 그러다가 인.. 더보기
소치 프로젝트 압하스의 총을 든 형제, 2009 ⓒRob Hornstra/Flatland Gallery 지난겨울 네덜란드 사진가 롭 온스트라의 러시아 전시가 돌연 취소되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입국조차 불가능한 처지다. 그가 ‘소치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작업으로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러시아에 관한 작업을 해오던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올림픽이 열릴 소치에만 4년 넘게 드나들었다. 그동안 러시아의 따듯한 휴양지가 어떻게 동계스포츠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위해 화려하게 변모하는지를 추적한 것은 물론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랬듯 가난한 마을들은 부서지거나 감춰졌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맞이한 도시의 호텔, 유흥업소에 기생하며 꿈을 키운다. 이런 기회에서.. 더보기
도시의 깊이 금혜원, Urban Depth D0003, 2010 축축한 붉은색 바닥 위로 바퀴 자국이 산만한 얼룩을 남긴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네 개의 불빛은 마치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스튜디오의 조명처럼 이 공간에 강한 존재감을 만들어 준다. 정갈해 보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콘크리트 공간은 사진 속에서 묘하게 도시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 시설물이 도시에 있으리라는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작가의 중립적이고도 차가운 시선은 이 공간을 현대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도대체 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익명의 장소는 어디란 말인가. 금혜원의 은 도시 지하에 숨겨놓은 쓰레기 처리장에 관한 연작이다. 화려하고 말쑥한 것들로 치장한 도시는 이 처리 시설에 기생하면서도 결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간판도 없이 지하 .. 더보기
白, 응축된 시간의 색 1970년대 젊은 사진가가 영화를 보다 문득 영화 한 편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관객으로 가장한 채 극장에 들어가 대형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1920~1930년대에 지어진 미국 극장의 아르데코풍 장식은 화려했고, 관객 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화가 시작할 때 카메라 셔터를 열어뒀다가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셔터를 닫았다. 무수히 많은 필름들이 돌아가며 스크린 위에 재현시켜 놓은 두 시간 동안의 사건과 사고는 그렇게 그의 필름 한 장에 응축되었다. 사진 속에서 장시간 빛을 쪼인 스크린은 온통 하얀색이 되었다. 대신 어두워서 한눈에 알아볼 수 없던 극장 내부는 구석구석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대표작 ‘극장’ 시리즈는 이.. 더보기
벗은 남자가 더 아름답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을 꼽으라면? 아마 아폴론일 것이다. 비너스가 아니라 아폴론이라고?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는 남성 누드만이 조각의 전형이었다. 비너스 같은 여성 누드상이 등장하려면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왜 남성 누드만이 대대적으로 성행한 것일까? 남성과 나체에 대한 남다른 생각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성들이 벌거벗는 일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벌거벗음은 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편안하고 자유로운 것, 즉 일종의 문명적인 상태를 의미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나체가 되기 위해 체육관으로 갔다. 김나지움은 젊은 아테네인에게 나체가 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김나지움(체육관)이라는 말이 ‘완전한 나체’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