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만약 사진 속에서 누군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림자 밑에 매복한 군인들이 달려나오는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상상은 곧 소리로 바뀐다. 달려가는 군인의 거친 군화 소리, 휙 개머리판을 내리치는 소리,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으악 차마 끝까지 못 내지른 비명, 푹 맥없이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 입이 없는 사진에서 이렇게 처참한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 소리가 잦아들 때, 이미 창백한 흑백사진은 흥건한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1980년 5월27일 광주 충장로에서 찍힌 사진이다. 손글씨처럼 투박한 간판을 살펴보면, 오락실, 당구장, 고전 음악실, 생맥줏집 등 이곳은 젊은이들의 거리로 짐작된다. 저 멀리 삼복서점 간판까지 보일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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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제자리
눈동자에도 기억이 있는 걸까, 멀리 흐린 바다, 가까이 교복 입은 학생들. 바다와 교복만 눈에 스쳐도 왜 팽목항, 세월호가 보이는 걸까? 동공에서 호출된 기억은 일본 오키나와 바다를, 일본 학생들을 진도 앞바다로, 단원고 아이들로 둔갑시키고 만다. 망막에 각인된 기울어진 배는 더 이상 바다를 바다로 볼 수 없게 한다. 언제쯤 잃어버린 바다를, 침몰한 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전시 중인 허란의 사진전 (류가헌·3월11일까지)은 제주 강정에서 밀양, 팽목항까지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던 눈동자의 기억을 따라간다. 아빠와 엄마가 싸울 때 딴청 부리며 예쁜 그림을 그리는 아이처럼, 작가는 아픈 풍경들 앞에서 딴 곳을 바라본다. 갈등이 첨예한 현장 속에서 찍힌 손톱 모양 초승달, 망아지 한 마리,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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